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한복음 10장 10절 -
비가 추적추적 오는 무채색의 하늘은 바깥세상을 딘의 세계처럼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딘은 고개를 힐끔 들어 그의 얼굴을 반사하는 회색 표면을 바라보았다. 금속으로 된 문 뒤로는 그가 오전에 부검한 시체 한 구가 놓여 있었다. 생명이 꺼진 시체는 마찬가지로 회색 부검대 위에 놓여, 빛바랜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왜? 죽은 남자는 버석하게 굳은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그에게 질문을 하려는 듯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딘은 그의 심장을 들어내며 대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말이야. 부검 결과, 남자를 죽음에 이루게 한 것은 살인마의 둔기가 아닌 몇 년간에 걸쳐 습관으로 자리했을 패스트푸드 섭취였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딘은 허공을 응시하는 시체를 도로 냉동고에 넣었다.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건 그를 그리워하며 살아갈 사람들의 역할이었으니까.
딘은 일주일에 세 번 부검실로 출근을 했다. 남들이 빨간 연필꽂이와 노란 화분, 작은 초록 물뿌리개가 놓인 책상에 앉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일을 할 때, 딘은 거의 모든 것이 은회색 스테인리스로 이루어진 작은 세상에서 창백한 몸뚱이들을 내려다보며 일과를 보냈다. 바깥세상의 사람들이 회계와 세금 계산과 관련된 보고서를 작성할 때, 딘은 피해자의 손톱 밑에서 발견된 흙이나 폐에서 발견된 구더기가 얼마나 자랐는지에 관한 글을 써 내려갔다.
이따금 딘은 시체를 대신해 차가운 냉동고에 누운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했다. 한기에 파르르 떨리는 입술 틈새로 숨을 내뱉으면, 선명한 하얀 입김이 도리어 그에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줄 것만 같았다. 정신을 놓은 거라고, 그렇게 황폐한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마음이 피폐해진 게 틀림없다고 그의 동생인 샘은 열변을 토했지만 딘은 그게 아님을 알았다. 이 일을 맡기도 전부터 그의 내면 깊숙이 뒤틀린 부분이 존재했으며, 다만 딘이 그 부분을 억누르며 살아왔던 거라고.
오히려 검시관이 된 지금은 어두운 생각이 이전보다 적어졌다. 어쩌면 그 책임은 이 일을 추천했던 존재이자, 지금은 그의 남편이 된 지미에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미를 떠올리자 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자리했다. 지미는 그의 이해자였다. 외과 의사로 일하는 지미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딘보다도 더 힘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미는 항상 딘을 위로하려 들었다. 딘은 지미 덕에 살아갈 활력을 얻었고, 그를 통해 회색을 마냥 죽음과 연관 짓지 않게 되었다. 빛바랜 회색 스웨터나, 함께한 지 어언 20년이 다 되어가 검은 머리칼 사이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은빛을 볼 때면 딘은 이상하게 앞으로를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만일 정말 신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그는 딘을 위해 지미를 설계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거나. 그들은 완벽한 한 쌍이었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딘은 오늘의 마지막 보고서를 타이핑하며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거렸다. 노란색의 테두리를 지닌 벽시계는 아마 이 공간에서 가장 뚜렷한 색채를 띠는 물건일 터였다. 그 시계는 조금 특이했는데, 시침과 분침을 가리키는 시곗바늘의 길이가 똑같았다.
딘은 때때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구분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은 1시 50분이거나 혹은 10시 10분일 수 있었다. 지미의 퇴근 문자를 받은 딘은 지금이 10시일 거라 지레짐작할 수 있었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만일 시계가 구분하지 못하는 두 개의 다른 시간대가, 저 시침과 분침 사이에 걸려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햇살이 잘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딘의 감각은 오래된 장비들과 함께 녹슬어만 갔다. 딘이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이 저녁 10시가 아니라 오후 1시의 시간이라면? 혹은 딘이 그 두 시곗바늘 사이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초침에 불과하다면? 나아가지 못하고 사이에 낀 채, 태엽이 돌아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존재. 언젠가는 시침과 분침 사이 쩍 벌린 입에 딘은 잡아먹힐지도 몰랐다.
그때 누군가 사무실의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딘은 손에 들린 펜을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딘의 상상과는 달리, 잘 작동하는 초침이 12에 다다르자 분침은 한 칸 앞으로 나아갔으며 시간은 멀쩡히 흘러갔다. 딘은 그가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업계 사람들에게 있어 퇴근 시간 무렵의 노크는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딘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윈체스터 씨?”
“아, 임마누엘. 이쪽으로.”
임마누엘이 이 시간대에 그를 찾아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의 등 뒤로 하얀 천이 덮인 시체 한 구가 눈에 들어왔다. 딘은 복도를 따라 작은 사무실 바로 옆에 붙은 부검실로 임마누엘을 안내했다. 잠자코 그의 뒤를 따른 임마누엘의 발소리 위로 운반 수레의 바퀴가 삐걱대는 소리가 겹쳐왔다. 부검대 위로 천이 덮인 시체를 능숙하게 옮기는 임마누엘의 모습을 팔짱 낀 채 지켜보던 딘이 고개를 내 저었다.
“퇴근은 물 건너간 것 같네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임마누엘 씨가 왜 죄송해요? 이 사람을 죽인 게 아닌 이상은 전혀 잘못이 없죠.”
장갑을 낀 딘은 시체의 발가락에 걸린 태그를 찾으려다 검게 타버려 살점이 너덜너덜한 살덩어리를 발견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죽은 사람은 아니군. 좋은 곳에 갔길. 검붉은 피부 위로 더욱 선명한 하얀 종이 태그는 백지상태였다.
“존 도(John Doe)인가요?”
“네. 신원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할 일이 많아지겠네요. 아쉽군요. 오늘 남편과 저녁 먹기로 했는데.”
“특별한 날이었습니까?”
“아, 네. 오늘이 그와 처음 만난 날이거든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이 시체는 무슨 경위로 이리 오게 되었나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차는 전주를 들이받은 채였고, 병원에 이송될 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계속 그의 배우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더군요.”
저런. “사인은 차에 일어난 화재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그건 아닙니다.”
“네?”
“차는 멀쩡했습니다. 전주를 세게 들이받은 것도 아니었고. 운전자는 경상을 입었거나 멀쩡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목격자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이미 이런 상태였다고 말하더군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맣게 타 있었다고.”
“그 말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고요?”
“그것보단 ‘불이 붙었다’라는 표현이 정확할 겁니다. 불을 붙일 수 있는 도구조차 발견되지 않았기에.”
딘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사람이 자연발화로 죽을 수 있는가? 그는 언제 스스로가 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핸들을 꽉 쥔 손가락 틈새로 새하얀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코를 찌르는 감각이 창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시골 공기가 아니라, 자신의 살이 타는 냄새라는 걸 알았을 때? 어두운 밤길을 운전하던 차 주인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환한 빛.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서 아마 차를 운전하던 그 사람을 누군가가 보았더라면, 그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죽음도. 딘은 까맣게 타 버린 피부에 손을 대 보았다. 살은 아직 따뜻했다. 그러나 무슨 조치를 취하기도 전 갑작스럽게 그의 손목을 낚아챈 두꺼운 손에 딘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조심하세요.”
그의 손목을 꽉 잡은 임마누엘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딘을 살피고 있었다. 딘은 처음으로 임마누엘이 푸른 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이전에는 몰랐지?
“조심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시체잖아요.”
“아직도 타고 있다고 합니다. 산불이 잦아들어도 나무뿌리들은 계속 땅속에서 타는 것처럼, 아직도 피부밑이 타고 있다고.”
딘은 하얀 천 밑으로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시체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사실일까? 새카만 피부 아래로 붉은 살덩이 대신 혈관을 따라 불꽃이 아직도 타들어 가고 있을까?
“…근데 이상하지 않아요?”
“무엇이 말입니까?”
“냄새가 안 나잖아요.”
“냄새라니, 어떤…”
“살이라던가 머리카락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나야 할 텐데, 아무 냄새도 안 난다고요. 설령 이미 타는 게 멈췄다 해도 그 악취가 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세상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두 남자는 침묵을 고수했다. 딘은 시체의 머리가 위치하는 곳의 움푹 팬 두 개의 작은 둔덕을 응시했다. 눈이 있어야 할 곳. 그 부분을 먼저 확인한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빛이 꺼진 변해버린 눈을 마주한다면―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 그저 또 다른 시체에 불과하다는, 그냥 운이 더럽게 없었을 뿐인 사람의 시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순간 창밖으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두운 부검실이 순간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미동 없는 임마누엘에 비해 딘은 하얀 천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임마누엘은 여전히 딘의 손끝이 닿았던 천 끝자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역시 유사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듯. 괜히 다른 사람까지 고생시킬 건 없지. 헛기침을 한 딘은 그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이제 가보세요. 누구 하나라도 빨리 집에 가야죠.”
“여기에 서명해 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비도 많이 오는데.”
딘은 펜을 들어 종이 끝에 자신의 서명을 적었다. 클립보드를 넘겨주던 딘은 임마누엘의 소매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손목시계를 발견했다. 샛노란 시곗줄에, 분침과 시침의 길이가 같은 시계.
“신기하네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그 시계요. 제 남편도 같은 걸 차고 있거든요.”
“그렇군요.”
임마누엘은 자신의 손목을 확인하는 시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딘에게서 넘겨받은 종이를 한번 확인하고는,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윈체스터 씨. 그리고 신이 당신과 함께하길.”
의미심장한 임마누엘의 인사와 함께 복도 끝의 문이 닫히자 딘은 다시 한번 홀로 남겨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전히 홀로는 아니었지만. 딘은 고개를 돌려 부검대 위에 놓인 하얀 천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께름칙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떤 딘은 가운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여보세요? 지미?”
“딘. 나도 방금 일이 끝났다. 그리로 데리러 가도록 하지.”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
“새 시체인가?”
“어. 그것도 아주 모양새가 안 좋은 놈이야. 몇 시간은 걸리겠어.”
“아쉽게 되었군. 오늘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라고? 나도 물론 알지. 먼저 들어가서 저녁 먹어.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데. 우리끼리 식사는 주말에 해도 되니까.”
“알았다, 딘.”
전화 너머로 세찬 빗소리가 들리자, 부검 도구를 정렬하던 딘의 손길이 멈칫했다. 빗길에 운전하는 남편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저 앞에서 정체 모를 빛이 섬멸한다. 아주 순식간에 환하게 타오르고, 손쓸 새도 없이 모든 게 스러진다.
“비가 많이 오는군.”
“…조심해, 지미.”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지미는 눈치챈 것 같았다. 조금 떨려오는 딘의 목소리 밑으로 주체할 수 없는 불안을. 이어진 지미의 목소리에는 아주 부드러운 구석이 있어 딘은 거의 얼굴을 붉힐 뻔했다.
“내 걱정은 마라, 딘. 어둠을 무서워하는 건 네가 아닌가?”
“그건 네가 이상한 거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어딨어?”
지미의 낮은 웃음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오자 딘도 그제야 작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나는 괜찮을 거다, 딘. 일을 마치고 집에 조심히 오도록. 신이 너와 함께하길.”
신이 당신과 함께하길. 임마누엘도 같은 말을 했었다. 딘이 무어라 대꾸하기 전 전화가 끊겼고 그가 잠시나마 남편의 존재를 통해 누렸던 약간의 위안도 눈 녹듯 사라졌다. 고요한 부검실에는 창밖을 간간이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복도에 울릴 뿐이었다. 부검대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 딘은 한숨을 내쉬고는 서서히 하얀 천을 위로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목 부근에서 멈칫했다. 딘은 얼굴 부분에 접힌 천을 올려 두었다. 두개골 절개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어차피 내겐 시간이 아주 많은걸. 딘은 메스를 들어 시체의 어깨부터 흉부를 따라 살을 대각선으로 가르기 시작했다.
망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알려줄 뿐이다. 무엇이 그를 이곳에 이르게 하였는지. 누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허나 시체의 흉골을 들어 올리던 딘은 문득 망자가 만일 직접 말을 한다면, 그렇다면 의문이 더 쉽게 풀리지 않을까 싶었다.
대체 누가 당신에게 이런 짓을 한 거지?
검게 타들어 간 피하 조직과 장기는 정말 그가 자연적으로 불이 붙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시사했다. 딘의 손이 분주해졌다. 메스를 집느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밖의 빗소리와 기묘한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이건 말이 안 돼. 길이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늑연골을 비교하며 딘은 생각했다. 하나는 성인 남성의 것으로 보였지만 다른 하나는 키가 족히 3m는 넘어가는 존재의 것으로 보였다. 시체의 몸 안에는 제각각 크기의 뼈와 장기가 마치 기이한 퍼즐 조각처럼 들어차 있었다. 딘이 만일 부검 진행을 안 했다 하더라도, 혹은 애초에 몸에 불이 붙어 죽음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몸 밖으로 터져 나왔을 것처럼. 딘이 잘 몰랐더라면, 이 시체는 아마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본래 인간이었다가 변해가는 것. 하지만 대체 무엇으로 변하려는 걸까?
“…이게 뭐야.”
나지막이 중얼거린 딘의 손에는 그가 아까 절단한 늑골이 들려 있었다. 뼈에는 이상한 흠집이 빼곡했다. 딘은 손에 들린 늑골을 흐르는 물에 씻어냈다. 그을린 살점이 조금씩 씻겨 나가자 뼈에 새겨진 이상한 문양이 점차 모습을 드러났다. 언어인가?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양은 마치 고대의 상형문자를 연상시켰다.
“무슨 시술을 받고 다닌 거야?”
장갑을 벗은 딘이 혼잣말을 구시렁대며 발걸음을 선반의 쪽으로 옮겼다. 사진을 찍어 스캔본을 돌려볼 심산이었다. 딘의 지금 가장 유력한 추론은 부검대에 누워있는 저 남자가 열렬한 컬트의 일원이었고 장기와 뼈에 문양을 새기는 것을 허락했으며―그러기엔 개복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딘은 무시하기로 했다. 또 그게 비정상적인 대칭을 이루는 내부 구조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도.―그 대가로 위쪽의 천벌을 받아 몸에 불이 붙었다는 것. 딘은 선반에서 카메라를 꺼내며 고개를 내 저었다. 오늘이 이런 날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남편과 처음으로 만난 걸 기념하는 날에, 이상한 시체와 좁은 공간에 갇혀 오붓한 저녁을 보내게 될 줄은. 항상 그렇듯 작동하지 않는 카메라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치던 딘은 실수로 플래시를 터뜨리자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딘은 보았다. 찰나의 순간에, 플래시 빛에 의해 투명한 유리 선반 위로 모든 것이 반사되었다. 카메라를 든 딘부터, 벽에 붙은 채 굳게 잠긴 냉동고의 문, 그의 어깨 너머 놓인 텅 빈 부검대, 그리고 부검대 옆에 미동 없이 서 있는 누군가의 형상을.
순식간에 빛이 잦아들었지만 딘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잘못 봤을 거야. 인간의 뇌는 아주 쉽게 그 주인을 기만한다. 스트레스 때문에 헛것을 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뒤를 돌아. 하지만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뒤를 돌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겠어? 뒤돌아보는 바람에 차마 마주할 수 없는 어두운 진실과 눈을 마주친다면? 조금 전까지 그의 손끝에서 뻣뻣하게 굳어있던 시체가, 바로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딘은 손을 뻗어 부검대 끄트머리에 걸쳐 둔 메스를 집었다. 손가락이 작은 금속을 휘감자 딘은 카메라를 빠르게 패닝하는 것처럼 몸을 휙 돌렸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찌를 듯 메스를 들은 손을 뻗었지만 딘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부검대 위로 향했다. 그가 발견한 건 얼굴에 천을 덮은 채 얌전히 누운 몸뚱어리뿐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딘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터질듯한 심장 부근을 움켜쥔 딘은 당장이라도 복도로 도망치는 상상을 하였지만, 시선은 미동 없는 몸에 고정한 채였다. 여전히도 그의 뇌는 확인하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저것이 움직이지 않았는지. 정말로 죽은 것이 죽은 그대로 남아 있는지. 천으로 덮인 머리부터 절개된 부위, 가장 심한 화상을 입은 오른쪽 손목. 그리고…
마른침을 삼킨 딘은 한쪽 팔로 바닥을 지탱한 채 간신히 바닥으로부터 몸을 일으켰다. 도로 균형을 잡자 딘은 어깨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주저앉으며 삐끗한 것인지 왼쪽 어깨가 아려왔다. 아픈 어깨를 부여잡은 채 딘은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디디면서도, 본인이 그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분명 죽은 자는 그의 발소리를 듣지 못할 텐데도. 딘은 이상하게 저것을 깨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검대 머리맡에 도달한 딘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느끼는 이질감의 정체는 근원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딘의 뇌는 그를 속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앞에 있는 이것이, 아니 정확히는 이 ‘자’가 그를 속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주 작은 실수로. 아주 작은 디테일의 차이 때문에.
아까는 분명 없었어.
시체의 손가락이 접혀 있었다. 아까는 꼿꼿하게 펴져 있던 부분이 지금은 살짝 안으로 말린 채 딘을 유혹하고 있었다. 펴보고 싶지 않아? 이 자는 철저히 딘을 위해 설계된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라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딘이 이 유혹을 결코 뿌리칠 수 없다는걸. 딘은 붕대 가위를 빼 들었다. 그는 시체의 피부에 손상이 가지 않게 조심스레 손가락 틈 안쪽으로 가위의 날을 집어넣어 사이에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그의 손가락이 붙든 물건을 빼내었다.
그것은 작은 종잇조각이었다. 의외로 오래된 양피지나 인간 가죽으로 만든 것이 아닌, 되려 의사들이 사용하는 작은 노트에서 뜯은 것과 유사해 보이는 종이는 심지어 위에 제본을 뜯은 듯한 흔적까지 있었다. 딘은 조심스레 접힌 종이를 펴 보았다. 마찬가지로 잔뜩 그을린 종이에는 글이 쓰여 있었다. 놀랍게도 그가 아는 언어로. 딘은 천천히 내용을 따라 읽었다.
…이곳에는 아무런 경계도, 제약도, 한계도 없다. 따라서 고통도 없다. 죽음도 이곳에선 하나의 과정이나, 결말은 아니다. 오히려 나아가기 위한 길이다. 생명으로, 또 풍성함으로. 그러니 나의 변화를 슬피 여기지 말길. 카스티엘이 우리에게 약속했다, 딘. 무슨 일이 있던, 우리는 너와 함께일 거라고.
종잇조각이 그의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는 소임을 다했다는 듯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야. 동시에, 딘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아니어야만 해. 그가 천을 치우지 않으면서까지 절대 확인하지 않으려 했던 얼굴의 주인. 어쩌면 처음 임마누엘이 부검대 위에 그를 올려 두었을 때부터 딘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천 옆으로 빠져나온 손목에 걸린, 피부에 눌어붙은 손목시계의 존재를. 검붉은 피부 위로 노란 시곗줄은 더 진한 색을 띠었다.
딘은 부검실에서 뛰쳐나왔다. 떨리는 손가락은 가운 안주머니를 미친 듯이 더듬었다. 휴대전화를 빼내어 든 딘은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연인의 목소리가 담긴 음성사서함이 흘러나오자 딘은 겨우 붙들어 오던 이성을 놓고야 말았다.
“지미! 제발 전화 받아. 제임스! 제발 받으라고! 제발…”
“―급한 일이 있다면 제 남편 딘에게 메시지를 남겨 주시고―”
“아니라고 해줘. 네가 아니라고…”
뺨을 따라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며 후두둑 소리가 났다. 아니. 그게 아니야. 여전히 지미의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휴대전화는 딘의 손을 떠나 덜그럭 소리를 내며 바닥에 안착했다. 옷 솔기가 뜯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그의 뒤통수 너머로부터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를 악문 딘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서서히 뒤를 돌았다.
처음 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둠뿐이었다. 부검실 입구 앞, 전등이 꺼진 자리 아래로는 암흑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딘은 목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섬뜩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딘은 본능적으로 그 어둠 속에 무언가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 그가 느끼는 건, 머나먼 고대 그의 조상이 동굴의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파란 눈동자를 바라보았을 때 느낀 감정이라고. 그때 느낀 두려움이 DNA 깊은 곳까지 각인되어, 그를 이 순간으로 안내했던 거라고. 그가 어둠을 두려워했던 까닭은 딘이 그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딘은 암흑 속에서 꿈틀대는 형상을 보았고, 점차 딘이 있는 전등이 켜진 복도 쪽으로 걸어오는 무언가를 보았다. 빛이 닿는 곳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쌍의 새카만 발이었다.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듯 딘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깨 너머로 매캐한 냄새와 함께 치익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타고 있다고 합니다. 산불이 잦아들어도 나무뿌리들은 계속 땅속에서 타는 것처럼. 딘은 죽기 살기로 달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복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밖으로 향하는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엔 끝없이 길게 뻗어나간 복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저 멀리에 작은 직사각형이 보였지만 딘은 아무리 달려도 문에 닿을 수가 없었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던 딘은 힐끔 벽을 보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를 쫓는 그림자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실루엣은 복도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했다. 변하고 있어. 꿈틀거리는 형상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더는 인간이 아니야. 딘은 지금 뒤를 돌아본다면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코너를 도는 데에 성공한 딘은 청소 물품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 딘은 자신을 가두었다. 딘은 숨을 헐떡이는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는 정말 막다른 길이었다. 들키면 더는 도망갈 데가 없었다. 창고에는 밖을 볼 수 있는 유리로 된 작은 창이 있었다. 딘은 숨죽여 그를 쫓던 존재가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려오자 딘은 눈을 꼭 감았다.
꿈일 거야. 이 모든 게. 사무실에서 잠든 채 꾸는 악몽이겠지. 눈을 뜨면 퇴근 시간일 거고. 임마누엘은 애초에 시체를 가지고 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겠지. 그게 현실일 거야…
딘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창고 안이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 작은 창문 너머로 그를 응시하고 있는 텅 빈 구멍을 제외하면. 딘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문고리가 스르륵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게 끝이구나. 딘은 지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생전 마지막으로 입에 담는 것이 그의 남편의 이름이길 바라며. 그리고…
“딘?”
딘은 눈을 깜빡였다. 눈물로 흐릿한 시야에 따스한 빛이 들어왔다. 딘은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다정한 남편의 얼굴을 마주했다.
“거기서 뭘 하는 건가?”
말문이 막힌 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더 이상 비품 창고 안이 아니었다. 익숙한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마다 지미의 목에 딘이 둘러주는 넥타이나, 가끔 딘이 지미에게 입어달라고 조르는 남색 스웨터. 그는 옷장 안에 들어가 있었다. 지미와 그의 집 옷장.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지미가 있었다.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럼에도 살아 숨 쉬는 딘의 남편이.
“…지미? 지미! 맙소사. 어떻게―”
딘은 지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잠시 뻣뻣하게 굳은 지미는 딘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끼자 이내 딘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려 주었다. 딘은 한참을 오열했다. 과호흡이 오기 직전의 딘을 능숙한 의사답게 진정시킨 지미는 그를 부엌으로 이끌어 갔다.
지미가 어깨 위에 덮어준 담요를 꽉 붙든 딘은 아직 가시지 않은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왼쪽 어깨의 통증도 여전했다. 지미가 차를 끓일 동안 딘은 그가 겪은 일을 주절주절 늘어놓았으나, 그 와중에도―물론 딘은, 그 존재를 평범한 ‘시체’라고 칭했다. 그 시체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나, 어떤 몰골이었는지는 괜히 지미에게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딘은 자꾸만 주위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가 당장이라도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딘은 여전히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창 너머의 흐릿한 회색을 멍하니 바라보던 딘은 지미가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식기 전에 마시도록. 정말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나?”
“거기는 당분간 발도 들이기 싫어. 아니다, 그냥 아예 내일부터 출근 안 하려고.”
딘은 찻잔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치곤 내용물 온도가 낮았다. 이상하네.
“환각이나 악몽의 가능성은 없는 게 확실한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 했지.”
“그런 게 아니었다니까! 네가 직접… 됐다. 아무튼 차원이 달랐어. 정말 생생했다고. 아직도 그 존재가 바로 등 뒤에 있는 것만 같아.”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딘. 당분간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벼락에 맞아 타죽은 사람 따위는 잊어버리고,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게 좋겠어.”
지미의 말은 놀랍도록 달콤했다. 정말 그의 말을 들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았고, 당장이라도 지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이 모든 악몽을 잊고 싶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영민한 딘의 두뇌는 지미의 말이 입을 떠나자마자 끔찍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찻잔을 두 손으로 단단하게 움켜쥔 딘은 접시를 식기세척기에 넣는 지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떨리는 딘의 목소리에도 지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평소였으면 바로 뒤를 돌아, 딘 앞에 한쪽 무릎이라도 꿇고 상태를 확인했을 텐데. 딘은 그제야 보았다. 마치 줄에 달린 마리오네트마냥 삐걱대는 어깨와 부자연스러운 고개 끄덕임, 심지어 접시를 잡은 손마저 틀렸다. 이것은 지미가 아니라, 지미의 ‘시늉’을 하고 있다는 존재다.
“벼락에 타죽었다니. 나는 그 시체가 어떤 상태였는지 말한 적이 없는데.”
지미의 움직임이 멈추자 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미가 어깨에 덮어 준 담요가 바닥에 떨어지자 익숙한 한기가 딘의 발끝부터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딘이 지나치게 잘 아는 추위였다. 시체를 담는 냉동고의 온도.
“글쎄, 딘.”
지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고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라디오의 주파수를 평소와 같이 맞춰두었지만 생전 처음 듣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어딘가 맞지 않았다.
“적어도 네가 예상했던 것처럼 불타 죽은 건 아니었어.”
부엌을 비추던 노란 조명의 색깔이 순식간에 푸르스름한 색으로 바뀌었다. 그 조명 아래에서 본 그들의 집은 더는 사람이 사는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딘이 있던 부검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난 그곳을 떠난 적이 없구나. 여긴 그들의 집이 아니었다. 지미의 푸른 눈이 어둠 너머에서 은은하게 빛나자, 그들을 둘러싼 공간도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지미가 한 발을 내딛자, 마찬가지로 그들을 둘러싼 벽이 수축하였다. 이 모든 것이 그야. 딘은 좁은 창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존재에게 삼켜진 모양이었다.
“카스티엘.”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딘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지미가―아니, 지미의 몸을 빌린 카스티엘이 입을 열었다.
“안녕, 딘.”
딘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고, 바닥에 쓰러져 오열하고 싶었으며 동시에 그는 눈앞의 존재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왜 나예요? 왜 하필이면 지미고? 왜 우리를…”
“이해를 못 한 모양이군. 애초에 ‘지미’라는 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딘. 부검대 위의 시체도, 임마누엘도 마찬가지고. 네가 만난 모든 것이 곧 나지.”
딘은 임마누엘의 푸른 눈을 떠올렸다. 그가 찼던 손목시계와, 지미에게 딘이 결혼기념일에 선물한 손목시계를 떠올렸다. 딘은 자기도 모르게 벽을 보았다. 벽에는 시계가 하나 걸려있었다. 같은 시계였다. 모두 같은 공간이었고, 모두가 같은 존재였다. 언제부터였을까? 길이가 완전히 같은 시침과 분침 사이의 빈 공간으로 얇은 초침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공간은 딘이 사무실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좁았다. 초침은 좁은 틈새에서 어디로 향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초침의 공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딘. 그곳에 국한된 너의 세계도 마찬가지지.”
카스티엘의 손이 딘의 왼쪽 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점차 심해지던 어깨의 통증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혹은 딘이 사그라드는 걸까? 아니, 넌 온전해지는 거다. 카스티엘의 목소리가 머리 안에서 울렸다. 카스티엘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것보다도, 딘은 어디에 있는 걸까? 시간과 공간과 그것보다 더 오래된 개념들이 딘의 발밑에서 무너져 내렸다. 카스티엘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또 딘의 안에서 울려 퍼졌다. 네가 허락을 하기만 하면 된다, 딘. 나를 받아들여. 또, 너의 지미를. 그리고 우리를.
“…알았어요.”
저 앞에서 정체 모를 빛이 섬멸한다. 아주 순식간에 환하게 타오르고, 손쓸 새도 없이 모든 게 스러진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건물을 비추었지만 지하에 위치한 부검실에는 닿지 못했다. 어두컴컴한 부검실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선반의 카메라는 옆으로 옮긴 흔적이 있고 메스는 조금 비뚤어졌지만, 그 변화를 눈치챌 존재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텅 빈 부검대 위로는 하얀 천 한 장만이 놓여 있었다. 그 밑으로 무엇이 존재했는지, 그을린 자국조차 남지 않았기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고요한 복도 끝에는 노란 테두리의 시계 하나가 걸려있었다. 시침과 분침의 길이는 완벽하게 같았다. 더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시계의 초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