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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신 건 어제였다. 다만 사망 확정이 내려진 게 오늘이었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는지 모두가 잠든 새벽녘에 조용히 세상을 뜨셨다.

 사인은 예상대로 간부전이었다. 아버지가 입원해 있던 호스피스 센터에서 부고를 알리며 “부친께서는 다행히 고통 없이 가셨다”고 전했으나 솔직히 나는 고통스럽게 가셨어도 다를 게 없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는 눈뜬 모든 순간을 고통스럽게 사셨기 때문이다.

 여하간 센터는 가능한 한 빨리 장례 일정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누군가가 죽으면 다른 입원자들의 가족이 동요한다고 했다. 나는 내 아버지가 죽었는데 입원자들도 아니고 입원자들의 가족까지 신경 써야 하냐는 말을 꾹 삼키고 동생과 결정해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감사하다며 전화가 뚝 끊겼다. 연이어 샘에게서 전화가 와서 나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

 “누나, 어떡할 거야?”

 캘리포니아에 아주 뿌리를 내린 남동생은 드물게도 넋이 나간 목소리로 자그맣게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 나는 십수 년 전의 어떤 허름한 모텔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 우리는 아버지와 다섯 달째 연락이 끊긴 채 아버지가 우리를 맡기고 간 모텔에서 계속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선급으로 낸 숙박비는 애진작 떨어졌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곳은 개업 이래 만실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주인은 어차피 남아도는 객실을 하나 빌려주고 상하기 직전인 식재료를 치우면서 공짜 인력을 부릴 수 있으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사고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새미가 주장하던 대로 그동안 받은 팁을 모아 바비 아저씨네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면 지금 우리는 아버지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지 상상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오래간만에 사용된 모텔방을 청소하고 있는데, 모텔 주인이 기묘한 얼굴로 우리를 불렀다. 슬픈 소식을 어떻게 전해주면 좋을지 몰라서가 아니라 공짜 인력을 아까워하는 속셈을 숨기느라 엉망이 된 얼굴로 그는 우리에게 아버지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커다란 나무에 들이받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우리는 곧바로 체크아웃 수속을 하고(주인은 키를 받자 그날 점심이었을 샌드위치와 사과를 2개씩 건넸다) 병원까지 걸었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고 날씨가 크게 나쁘지 않아서 사고를 당한 아버지에게 간다는 사실만 잊으면 아주 오랜만에 피크닉을 간다고 느껴질 뻔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아버지의 소식을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구나. 운명의 잔인함에 대해 생각하느라 나는 그만 대답하는 것을 깜빡했다.

 “누나?”

 내가 한참 말이 없자 약간 더 기운이 없어진 목소리로 샘이 불렀다.

 “어? 어, 미안. 잠시 생각을 좀 하느라. 왜?”

 “캔자스에 갈 거야?”

 샘이 마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자를 부르듯 우리가 태어난 주를 부르는 것이 우스웠지만, 나는 굳이 꼬집지 않았다. 아버지와 일방적으로 사이가 안 좋은 샘이 내게 장례에 참석할 거냐고 의향을 묻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나와 다르게 새미는 태어난 지 반 년만에 로런스를 떠나서 나처럼 고향에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을 테였다.

 “가야지.”

 정비소라면 으레 생기는 엄청난 소음을 피해 들어온 사무실 의자에 앉아 나는 고개를 젖혔다. 가을 학기가 코앞인 시점이었다. 한창 정비소가 미어터질 시기에 최소 사흘, 최대 닷새를 쉰다고 하면 사장 얼굴이 볼 만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여성 정비공을 언짢게 보는 양반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쭉 쉬라고 할지도 모른다.

 “꼭 안 가도 되는데.”

 그때 샘이 전화기 너머에서 구시렁거렸다. 스물여섯이나 됐으면서 아직도 자기가 여섯 살인 줄 알아. 나도 모르게 픽 웃음소리가 새어 나갔다.

 “웃어?”

 “그럼 안 웃게 생겼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버지 장례인데 어떻게 안 가.”

 “우리가 안 가도 루퍼스 씨가 있잖아. 어차피 조문객도 없을 게 뻔한 데다 우리가 존 얼굴에 금칠하겠다고 근사한 추도문을 읊을 것도 아니잖아. 결국 센터에 딸린 기도실에 우리랑 목사만 달랑 서 있을 거 아냐.”

 “그건 심했다. 넌 아버지 장례식을 무슨 주말 성경 학교처럼 말하니.”

 그러자 차라리 주말 성경 학교인 편이 훨씬 나을 거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깨끗하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엄밀하게 따지면 루퍼스 씨도 조문객이지. 소식 들으면 바비랑 엘렌도 올 거고. 물론 나도 갈 거고. 그래서 넌 ”

 최근에 생긴 습관대로 지미를 빼고 말하자 샘이 의아한 목소리로 매서운 질문을 했다.

 “누나만? 지미는 어쩌고?”

 “그 사람은, 지미는…….”

 갑자기 허를 찔린 나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벙긋거렸다. 지미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지만, 요즘 나는 그에게 예전처럼 격렬한 무언가를 느끼지 못했다. 그건 지미도 마찬가지인 모양으로 우리는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도 열 마디 이상 나누는 일이 드물었다. 잠자리를 갖는 횟수도 줄었다. 그가 집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였는데, 지미가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다면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만으로도 심란한데 더 심란한 결혼 생활까지 덧붙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말할 수 있는 부분만 털어놓았다.

 “글쎄. 물어봐야지. 요즘 바빠서 집에도 잘 안 들어오거든.”

 “둘 사이에 문제 있는 거 아니지? 나 가정법도 조금 공부해 둘까?”

 이 녀석이 이제 고정 선임도 조금씩 생겨서 주니어 딱지를 뗄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자신감이 과하게 붙은 모양이다. 실제로 마주 보고 있었으면 뒤통수를 갈겨버리는 건데 아쉽게 됐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없지. 있어도 지금 할 얘기는 아니야. 어쨌든 난 캔자스에 갈 거고 바비랑 엘렌한테도 연락할 거야. 센터에는 모레 식을 치워달라고 할 거고. 그러니까 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누나-”

 마침 사장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나를 찾아왔는지 목 옆에서 손을 꺼떡이며 끊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다음에 다시 통화하자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장이 당연하다는 듯 빈자리에 앉으며 거만하게 나를 올려다봤다.

 “그래서 무슨 일이래?”

 “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뭐?”

 나를 씹어대려고 시동을 걸던 사장은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보수적인 사람답게 상을 당한 사람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유감이군.”

 한참 뜸을 들이던 사장이 마침내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고맙다고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장례식이 모레 열려서 사흘은 못 나올 것 같아요.”

 “사흘이나?”

 “장례가 캔자스에서 열려서요. 그래서 어쩌면 닷새가 걸릴 수도 있어요.”

 사장은 예상대로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적어도 무급 휴가를 쓰는 걸 막지는 않았다. 명확한 사유가 있으니 막을 수 없었으리라. 대신 오래 쉬어서 시간이 비는 만큼 오늘은 잔업을 하고 가라기에 알았다고 했다. 사장의 요구는 정당했다. 그야말로 대목을 맞은 정비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바빴다.

 원래보다 네 시간 늦게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10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깜깜한 집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이틀 치 짐을 싸야 했다.

 움직이지 않으려고 버티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장롱 깊이 넣어둔 더플백을 끄집어내고 물건을 하나둘 챙겨 넣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밤에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지미?”하고 부르니 얼굴 보기 힘들어진 남편이 부모 몰래 밤늦게까지 놀다가 들어온 사춘기 소년처럼 깜짝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어, 아직 안 잤네?”

 “응.”

 “어쩐 일로? 내일 출근하지 않아? 그건 뭐야? 어디 가?”

 놀란 마음을 추스른 지미가 한 걸음씩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물체를 본 까마귀처럼 고개를 까딱이는 폼이 썩 귀엽게 보였다. 피곤해서 그런가? 나는 픽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어디 가긴, 캔자스지.”

 “캔자스에는 왜? 출장 잡혔어?”

 “아니? 내가 자기한테 말 안 했던가?”

 “무슨 말?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리 오늘 전화 한 번 안 했잖아. 디아나, 무슨 일 있어?”

 남편이 얼떨떨하게 되묻는 말에 나도 당황스러워졌다. 분명 연락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야 남편이지 않은가. 하지만 휴가를 허락받고 나서 곧장 작업장에 복귀하지 않고 센터와 바비 아저씨, 루퍼스 씨에게 연락하다가 심기가 불편해진 사장의 헛기침 소리를 듣고 후다닥 뛰쳐나가느라 정작 지미에게는 연락하지 않은 걸 깜빡했나 보다.

 젠장. 벌써부터 대화가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에 나는 짧게 친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버지 장례식에 가야 해. 입원해 계시던 시설에서 치르거든. 시설 요금에 장례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뭐어? 돌아가셨어? 언제? 오늘?”

 “아니, 어제. 사망 진단은 오늘 아침에 내려졌고.”

 “세상에. 아침에 내려졌는데 연락이 지금 온 거야? 아니, 일하느라 못 받아서 퇴근한 뒤에나 연락이 닿은 거겠네.”

 원체 심성이 착한 지미는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성심성의껏 성호를 그으며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나나 샘은 부고를 듣고 명복을 빌어줄 생각은커녕 장례에 참여하느니 마느니 하며 실랑이나 벌였는데 말이다. 그 바람에 나는 다음 말을 하는 데 꽤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2교대를 뛰느라 지미를 배려할 체력, 그러니까 선의의 거짓말을 꾸며낼 체력이 없었으므로 한숨을 쉬며 사실을 실토했다.

 “사실 연락은 점심시간쯤에 왔어. 정신이 없어서 자기한테 연락하는 걸 깜빡했나 봐. 미안해. 난 정말 한 줄 알았어.”

 더플백에 짐을 다 넣어서 남은 건 지퍼를 닫는 것뿐이었던 터라 애꿎은 지퍼 손잡이를 괴롭혔다. 지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조금 미안했다. 그리고 조금은 무서웠다. 아무리 착한 사람에게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나 때문에 지미가 그 한계에 부딪혔을까 봐 무서웠다.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

 하지만 지미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경황이 없어서 그랬다는 말이 진실이라고 여긴 듯했다. 아니면 내가 힘든 시기에 자신을 찾지 않아도 납득이 갈 만큼 우리 사이가 멀어진 걸 인정했다든가. 어느 쪽이든 무슨 대수람. 괜히 말다툼하지 않고 넘어갔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나도 모르게 생긴 두려움이 한층 가셔서 죄인처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지미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스멀스멀 아래로 내려간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겠거니 생각하는 나에게 그가 여상스럽게 물었다.

 “장례식은 언제야?”

 “내일모레.”

 “그렇구나.”

 지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모범적인 남편의 얼굴이라 뒤늦게 그의 짐을 싸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그러면 점심때 전화했어도 같이는 못 갔을 거야. 디아나 너 혼자서도 잘 다녀올 수 있지?”

 그러나 지미는 단 한 마디로 그와 나를 구분 지었다. 암묵적으로 존재만 했지, 명시되지는 않았던 관계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심 그가 나와 같이 캔자스로 가겠다고 해주길 바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면 무릇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건 분명 이기적인 생각일 터였다. 나부터가 그의 행복도 슬픔도 알고 싶지 않게 된 지 제법 오래되었는데, 지미라고 내 행복과 슬픔에 관심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먼저 그를 져버렸으므로 배신감을 느끼는 것 또한 이기적일 터였다.

 “미안해. 웬만하면 같이 가고 싶은데 내일 중요한 미팅이 있어. 정말 빠질 수 없는 미팅이거든.”

 내가 멍청하게 입만 벌린 채로 답변하지 않자 지미가 사과해 왔다. 오히려 사과받아야 하는 건 자신이면서.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괜찮아. 갑자기 나 때문에 일정을 빼달라고 할 순 없지.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

 필요 이상으로 세게 지퍼를 잠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미는 어째서인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먼저 선을 그은 건 자기면서.

 “난 내일 일찍 나가야 하니까 손님방에서 잘게. 잘자, 지미. 내일 미팅 잘해. 도착하면 전화할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손님방으로 도망치듯 걸었다. 그러면서 지미가 나를 따라오길 바랐으나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발걸음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더플백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몸이 천근만근 늘어졌으나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낯선 매트리스와 어색한 시트 위에 누워 잠이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쩌면 잠이 아니라 지미를 기다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이 트고 핸드폰 알람이 울릴 때까지 지미는 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거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고 나와서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어깨에 더플백을 맨 채로 현관에서 잠깐 고민했는데, 내가 차를 타고 가버리면 지미는 꼼짝없이 대중교통으로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차 키와 눈싸움하며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키를 집었다. 지미는 평소에도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기보다는 대중교통을 타는 게 좋다며 한사코 키를 양보하곤 했으니 사나흘 차가 없다고 크게 불편해하지 않을 터였다. 정 자동차가 필요하면 동료에게 태워달라고 부탁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한 손에 차 키를 꾹 움켜쥐었다.

 그다음부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아직 출근러시가 시작되지 않아 한산한 도로를 산뜻한 마음으로 내달렸다. 90번 국도에서 55번 국도로 갈아탈 즈음에 핸드폰이 여러 번 울리다가 잠잠해졌다. 누가 전화를 걸었을지 궁금했지만 오래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고속도로 위에서 전화를 받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핸드폰은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 확인하기로 하고 우선은 속력을 높였다.

* * *

 핸드폰을 확인한 건 브런치를 먹을 겸 차에 기름도 채울 겸 트럭 스톱에 멈췄을 때였다.

 차에 주유 노즐부터 꽂고서 느긋하게 편의점을 털어온 나는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샘에게서 한 번, 지미에게서 두 번, 총 세 건의 부재중전화와 한 건의 문자가 와 있었다. 문자는 샘이 보낸 것으로 자신 없이 나 혼자 유언을 들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며 캔자스시티에서 보자는 내용이었다. 지미한테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메시지도, 음성 메시지도.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서 샘에게 네가 언제쯤 올지 모르니 루퍼스 씨와 미리 만나서 점심이라도 먹고 있겠다는 요지의 문자를 보내자 놀랍게도 곧장 답장이 왔다.

 [오후 1시 12분 도착 예정. 공항에서 봐.]

 “안 온다던 놈이 잽싸기는 엄청 잽싸네.”

 샌드위치를 질겅거리다가 흥 코웃음을 치고 문자 앱을 나가려다가, 나는 운명에 이끌리듯 아주 오랜만에 지미 탭을 열었다. 냉장고에 우유가 떨어졌다는 보름 전의 문자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겨 있었다. 뭐라도 보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제 곧 캔자스라든가 미팅은 잘 끝났냐라든가 점심 잘 챙기라든가, 그런 사소한 내용을 몇 번 적어봤다가 결국 어떤 내용도 보내지 않고 탭을 나갔다. 인제 와서 안부를 주고받기에는 새삼스러웠고 낯간지러웠다. 토피카에 숙소를 잡고 한 번, 장례식이 끝난 다음 한 번 보내서 상황 보고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나는 루퍼스 씨와 1시 30분에 점심 약속을 잡고서 다시 도로를 탔다. 빨리 이 모든 일을 해치우고 시카고로 돌아가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록밴드 음악을 듣다가 과하게 흥이 올라 액셀을 조금 세게 밟아서인지 예상 시간보다 일찍 캔자스시티에 도착했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대고 출구에 서자 딱 1시 5분이었다. 다행히 순항이었는지 조금 기다리자 도착 홀에 우르르 쏟아져 나온 사람들 머리 위로 동생의 머리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여기라고 손을 흔들자 무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거대한 몸으로 포옹해 왔다.

 포옹을 마친 우리는 차에 탔다. 샘의 길고 긴 다리를 수납하는 소동을 해결하고 루퍼스 씨와 만나기로 한 가게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언급하지 않고 근황이나 나누었다. 아버지의 존재는 커다란 투명 코끼리처럼 우리 사이에 존재했으나 우리는 그 코끼리와 대면하는 시간을 최대한 뒤로 미뤘다. 아버지를 우리의 삶에서 최대한 유리시키며 살아온 탓이었다.

 루퍼스 씨와 보기로 한 식당은 알고 보니 완전 채식 식당이었다. 여기저기 푸릇푸릇한 식물들로 꾸며진 외관을 보고 이미 만면에 웃음을 띠었던 샘이 메뉴를 확인하자마자 대놓고 웃어대길래 나는 동생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칼처럼 꾹 찔러넣고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루퍼스 씨에게 따졌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시련을 줄 수 있어요!”

 그랬더니 바비보다도 오래 산 늙은 여우는 흥,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채식 식당 중에서도 버거를 파는 곳으로 데려온 걸 감사히 여기도록 해라, 꼬맹이.”

 나는 두부 버거는 절대 햄버거일 수 없다고 화를 내려다가 말았다. 루퍼스 씨는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괴팍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였다. 속에 천 년 묵은 구렁이가 웅크리고 있는 노인을 말로 이겨 먹으려 들면 갓 서른이 된 창창한 나이에 아버지 옆에 묻히고 말 게 분명했다.

 한숨을 쉰 나는 메뉴판에서 그나마 사람의 음식이라 할 만한 메뉴, 그러니까 해시브라운, 스크램블드에그, 팬케이크에 블랙커피를 골라내 주문했고 샘은 놀랍지 않게 히피들이 먹는 히피 음식을 시켰다. 주문받은 웨이트리스는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쓱 사라졌다가 커피 석 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녀가 다시 떠나자 루퍼스 씨는 손깍지를 끼고 팔꿈치들을 식탁 위에 올렸다. 배는 채우고 진지한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식사하기 전에 하려나 싶어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하고 있으려니 루퍼스 씨가 은밀하게 말했다.

 “운전해서 왔겠지?”

 “그, 그런데요.”

 “그럼 아쉽게도 아이리시 커피는 나만 마실 수 있겠구먼.”

 그러더니 진지함은 온데간데없이 루퍼스 씨는 행복하게 웃으면서 재킷 안주머니에서 철제 플라스크를 슬쩍 꺼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커피잔에 위스키를 붓더니 각설탕 두 개를 넣고 보란 듯이 휘휘 젓는 것이었다.

 “진짜 얄밉다.”

 내가 이를 바득바득 갈자 루퍼스 씨도 샘도 웃음을 터뜨렸다. 루퍼스 씨가 점심을 사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아버지가 뭐 대단한 걸 유산으로 남겼을 리가 없어서 큰 기대도 없겠다, 나는 진작에 유언 따윈 없는 셈 치고 바로 토피카로 떠났을 것이다. 샘은 루퍼스 씨 차를 얻어타라고 하고.

 “여기서 더 놀리면 집에 간다고 하겠지? 인제 그만 놀릴 테니 안심하고 배 채워라. 자세한 얘기는 커피 마시면서 하자꾸나.”

 루퍼스 씨는 피식피식 웃으면서 때마침 나온 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나는 몹시 억울했지만, 루퍼스 씨 말대로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서 씩씩거리면서 팬케이크를 짓이겼다. 분노가 여실히 담긴 칼질을 본 새미가 자꾸 킥킥거려서 나도 테이블 아래로 팔꿈치를 찍는 것으로 대응했다.

 우리가 조용하게 완전 채식 식당치고 나쁘지 않은 식사를 마치자 웨이트리스가 어디에선가 다시 귀신같이 나타나 그릇을 가져가고 디저트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배를 꺼트릴 겸 커피를 마시면서 머릿속을 잠깐 정리했다. 식탁에는 루퍼스 씨가 어느새 올려놓은 서류 가방이 있었다.

 “그런데 유서를 이런 식당에서 읽어도 되는 거예요?”

 무언가를 골똘히 궁리하던 샘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유서 공개 같은 건 서재나 응접실에 모여서 엄숙한 분위기에서 하는 거 아닌가? 적어도 내가 본 영화에선 다 그랬는데. 오후 2시의 캔자스시티 소재 뉴에이지 비건 식당은 그런 폐쇄적이고 엄숙한 분위기와는 지구 정반대에 있었다.

 “너희가 유산 상속 하나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부잣집 아들딸이냐?”

 하지만 루퍼스 씨에게는 기도 차지 않는 얘기였는지, 그는 우리를 몹시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특히 변호사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새미를 특히 빤히 쳐다보다가 그새 새로 주조한 아이리시 커피를 홀짝이고 이어 말했다.

 “애초에 존의 유언을 내가 집행하는 이유도 별것 없다. 내가 그 빌어먹을 놈에게 남은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공증을 설 수 있어서가 다지. 또 하나 더하자면 그놈이 제 앞으로 재산이 있다는 걸 까먹은 덕분도 있겠구나. 알았다면 이미 술값으로 다 날려 먹었을 테니.”

 루퍼스 씨의 신랄한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쥐꼬리만 한 돈이라도 손 닿는 곳에 있다는 걸 알았다면 아버지는 술에 탕진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저희도 그 점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존에게 물려줄 재산이 있다니, 지나가던 개가 듣고 비웃을 소리라고요.”

 “뭐, 그 말을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이걸 알아야 해. 사실을 말하자면 그제까지만 해도 나도 내가 그 녀석의 유언집행인이라는 걸 몰랐다.”

 “그제요? 저희는 어제 부고를 들었는데요.”

 “법적 대행자라서 너희보다 내게 먼저 연락이 닿았나 보지.”

 “아니, 그럴 수가―”

 “어쨌든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 지루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고.”

 샘이 무언가를 쏘아붙이려고 하기가 무섭게 루퍼스 씨가 태평하게 코끝을 긁으면서 효율적으로 입을 막았다. 그는 샘이 입을 다시 뗄 시간을 주지 않고 가방에서 서류를 한 장 꺼내어 우리 쪽으로 밀었다.

 “중요한 건 이거지. 내가 금고에서 찾아낸 유서 복사본. 존 녀석이 아직 제정신일 때 쓰고 내가 공증하여 보관한 이 종이 쪼가리에 따르면 너희에게 상속되는 재산은 로런스에 있는 집 한 채와 메리 윈체스터가 친가인 캠벨 가에서 물려받은 27,481달러를 전부 원금으로 삼아 1997년부터 26년간 운용된 신탁. 이 두 가지다.”

 루퍼스 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류를 낚아채 내용을 읽었다. 루퍼스 씨가 말한 그대로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서명하고 루퍼스 씨가 법원에 상속등기를 제출하면 이것들이 고스란히 우리 소유가 되는 것이다.

 “이, 이만 칠천이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이만 칠천 달러가 절대적인 기준으로는 그리 많은 돈이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거금이었다. 당장 시카고 근교에 있는 우리 집만 하더라도 다달이 팔백 달러를 내야 했는데, 이만 칠천 달러가 있으면 3년은 걱정 없었다. 의식주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주거지가 3년이나 해결된다니 그만한 거금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더욱이 이건 신탁 원금만 따졌을 때의 이야기다. 매달 발생할 이자, 지금까지 발생한 이자를 생각하면 얼마나 불어났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나는 넋이 나가서 샘을 툭 건드렸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잘나가는 로펌에 주니어로 들어가 그럭저럭 고연봉을 받는 샘은 나보다는 침착했지만, 나보다 조금 낫다 뿐이지 비슷하게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런 돈이 있다는 걸 존이 정말 몰랐다고요?”

 현실이 하도 믿기지 않다 보니 샘은 모든 걸 부정하는 단계로 이행한 것 같았다. 동생은 인상을 찌푸리고 식탁 위에 무해하게 놓인 서류를 노려보았다. 루퍼스 씨는 그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지나가는 웨이트리스를 붙잡고 커피 리필을 부탁했다. 그녀가 아름답게 웃으면서 나와 샘에게도 의사를 묻기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인이 없으면 이 혼란을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웨이트리스가 잔을 채워주고 떠날 때까지 나와 샘은 또 각자 생각에 잠기느라 조용해졌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내게 성큼 다가온 이만 칠천 달러의 충격에 완전히 압도되어 수중에 그만한 돈이 있었으면 할 수 있었을 일들을 하나씩 상상하다가, 불현듯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싶어 허벅지를 꽉 꼬집어 보았다. 악 소리가 나게 아팠다. 이건 현실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분명 현실이었다.

 “왜 저희는 이걸 지금까지 몰랐죠?”

 찔끔 난 눈물을 티 나지 않게 닦아낸 나는 루퍼스 씨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아이리시로 만들지 않은 평범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루퍼스 씨는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가 너희 아버지 유언장을 확인해 볼 마음을 먹지 않아서였겠지. 나도 그저께까지 내가 유언집행자라는 사실도 몰랐다고 하지 않았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요. 친구 유서를 공증해 줬는데 그걸 까먹어요?”

 “뭐, 그때는 내가 존의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정확히는 바비의 친구였지. 그래서 까먹은 거 아니겠냐. 그리고 그게 벌써 몇십 년 전 일인데. 너희는 내가 수십 년 전 자료까지 끄집어내서 이걸 찾아낸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 꼬맹이들.”

 루퍼스 씨가 요즘 것들은 고마운 줄도 모른다고 툴툴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서류를 세계 8대 불가사의처럼 응시했다. 1997년부터 26년간 운용된 신탁이라는 것이 가슴에 박혔다. 내 기억이 맞으면 97년은 어머니가 로런스의 집에서 죽으면서 우리 가족이 불운해진 해였다. 한 마디로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자마자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우리에게 넘겼다는 뜻이었다.

 이걸 깨닫자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나와 샘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빈말로도 좋지 못한 아빠였는데, 자식에게 이만한 재산을 남기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니. 비록 알코올성 치매로 말년에는 오락가락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나저나 지금까지 수술 비용이나 호스피스 센터 비용이 우리 앞으로 청구되지 않아서 막연히 의료보험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신탁 이자에서 차감돼서 그랬던 거였네.”

 멍하니 앉아있던 샘이 불쑥 말을 꺼냈다. 샘은 그간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가 하나 풀렸다는 듯 조금 후련한 얼굴이었다. 나는 여전히 뇌가 굳어서 멈춰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새미 머리가 좋긴 좋다고 감탄하는 사이 루퍼스 씨는 볼일이 다 끝났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너희한테 내라고 하고 싶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유서를 잊고 있던 책임이 있으니 오늘은 먼저 말했던 것처럼 내가 사마. 다음엔 국물도 없어!”

 삿대질까지 하며 의견을 분명히 밝힌 노인은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를 여러 장 꺼내 내려놓고는 우리에게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순식간에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입만 벙긋거렸다. 한바탕 폭풍이 불어닥친 것 같았다.

 우리는 웨이트리스가 빌지와 루퍼스 씨가 남기고 간 현금을 가지러 올 때야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를 나선 뒤에는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몽롱한 정신으로 차에 탔다. 우리는 토피카로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손에는 아버지의 유서가 들려 있었고, 고작 두 시간 반 동안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토피카에서 호스피스 센터 근처에 있는 그럴듯한 숙소를 찾아 체크인했을 때는 벌써 6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쯤에는 내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 우리는 숙소 근처의 ‘제대로’ 된 버거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방에 틀어박혀 유산을 어떻게 분배할지 토론했다. 사실 말이 거창하게 토론이지, 어떻게든 더 주려는 나와 어떻게든 덜 받으려는 샘의 말꼬리 잡기 게임이라고 해야 올바를 터였다.

 격렬한 말꼬리 잡기 끝에 결국 나는 샘의 설득에 넘어가 신탁 계좌 잔금 1/3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떠안게 되었다. 샘은 다신 캔자스에 돌아올 생각이 없었고 나는 내가 처음 살았던 집에 묘한 애착이 있어 집을 바로 처분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그런 고로 내가 집을 관리하게 될 테니 집 소유권도 내가 갖고 그 집을 관리하는 데 돈이 필요할 테니 신탁 계좌에 든 돈도 대부분 내가 가져야 옳다는 것이었다. 변호사 자리를 도박으로 딴 건 아닌지 말씨름을 이어갈 때마다 내 발판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헤드록을 걸지 않았으면 샘이 받는 유산은 한 푼도 없을 뻔했다.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한 나는 어쩐지 마음과 정신이 폭삭 지친 기분이 들었다. 샤워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는데,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은 매트리스에도 불구하고 바로 잠들 뻔할 정도로 그랬다. 하지만 지미에게 전화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한 바가 있어(사실 옆 침대에서 샘이 매의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게 가장 컸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지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전화음이 연결되다가 8번째쯤 전화 연결이 취소됐다. 뭐지? 씻나? 안 받을 이유가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세 번째 전화까지 무시당하자 (당연하게도) 샘이 무척 수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 시선에 괜히 찔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변명했다.

 “아, 아하하, 지미가 많이 바쁜가 봐!”

 “시차 적용하면 시카고는 지금 밤 9시일걸? 퇴근하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다고 했어. 잘 끝내서 한잔하러 갔나 보지. 너도 그럴 때 있잖아! 그래서 못 받나 봐!”

 “그렇긴 한데…….”

 “남의 가정사에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자!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나는 샘이 더 이상하게 여길 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 불을 끄고 침대에 들어가서 이불을 머리까지 덮었다. 그래도 이불 밖에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불이라는 보호막 없이 고스란히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가 확보되자 샘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고 문자 앱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문자도 보내고 싶지 않은데,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해서 뱉은 말은 지키고 싶었다.

 [토피카 도착해서 방 잡았어. 할 얘기가 있어. 내일은 꼭 전화 받아줘.]

 이 간단한 세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몇 번이나 전부 지우고 다시 썼는지 모른다. 이러다가 또 날밤 새우겠다 싶어 눈을 꾹 감고 문자를 보낸 뒤에는 지미가 보낼 답장을 보고 싶지 않아서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고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두었다. 그리고 눈을 꾹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어제처럼 잠이 오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바로 옆에 머리만 닿으면 잠드는 녀석이 있어서 새근새근 숨소리를 듣다 보니 내 잠도 금방 찾아왔다. 덕분에 깊은 잠을 잤다.

* * *

 아버지의 장례식은 새미가 예상한 그대로 흘러갔다. 장례는 호스피스 센터가 방문객을 받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으나 참석자는 나와 샘, 루퍼스 씨, 바비와 엘렌, 마지막으로 센터에서 아버지를 담당한 치료사 조디 뿐이었다. 그러므로 나와 샘은 식을 길게 끌 거 없이 짧게 끝내달라고 요청했다. 센터가 부른 목사는 시간당이 아니라 건당 보수를 받는지 장례식에서 용납될 만큼만 화색을 띠며 장례를 치렀다.

 이미 어제부로 센터가 시신을 태워 재로 만들어 둔 상태였기에 목사가 상투적으로 읊는 기도문을 듣고 나와 샘이 의례적으로 센터 옆에 있는 호수에 한 움큼씩 재를 뿌리는 것으로 장례식이 끝났다. 아무도 존 윈체스터를 위해 추도문을 읊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례가 끝나면 안도감이라든가 후련함을 느낄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냥 집안일 하나를 끝낸 느낌이었다. 오히려 샘이 나보다 더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 몇 방울을 뚝뚝 흘려댔다. 그런 기회는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도문 후반부 내용은 동생을 기집애라고 시원하게 놀리느라 잘 듣지도 않았다.

 목사는 제 할 일을 마치고 벼락같이 자리를 떴다. 우리도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조디에게 그간 수고했다고 감사를 표하고 우르르 센터를 빠져나왔다.

 “이제 어쩔 셈이냐?”

 호스피스 센터 주차장에서 바비가 물었다. 나는 무척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으니 지금 시카고로 출발한다면 내일부터는 다시 정상 출근이 가능할 테지만, 유산을 물려받은 지금으로서는 서둘러 직장에 복귀하지 않아도 됐다. 그 때문에 해고당해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을 테니까.

 아, 그랬다. 나는 그제야 난생처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일자리를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는 사치를 부릴 수조차 있었다! 소름이 쫙 돋았다. 초가을의 따가운 햇볕을 받는 중인데도.

 나는 팔뚝을 손바닥으로 비비면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자, 내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집이었다. 안전하고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들을 기르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리하여 나는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바로 로런스에 있는 옛 고향 집에 가기로 했다. 샘이 직장이나 지미는 고려한 거냐며 현실적인 걱정을 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곳에 가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혀서 그런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일축했다. 내심 바비나 엘렌도 샘처럼 나를 꾸짖거나 타이를 줄 알았는데, 제2의 부모인 둘은 내가 원하는 걸 찾길 바란다면서 나를 꼭 안아주기만 해서 새삼스럽게 감동받았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데, 루퍼스 씨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뻔뻔한 얼굴로 헛기침을 큼큼하며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다 늙어서 소유권 이전이니 세금 문제니 하는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됐다는 볼멘소리를 하며 내게 열쇠 꾸러미와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넸는데, 그 바람에 엘렌에게 줄 거면 곱게 주지 꼭 말을 비꼬면서 줘야겠냐고 한 소리 듣는 건 올해 들어 본 가장 재밌는 광경이었다.

 그 뒤로는 각자 목적지가 정해졌다. 오늘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온 바비와 엘렌을 픽업한 루퍼스 씨가 어차피 공항에 가는 길인데 번거롭게 굴지 말라며 멋대로 새미를 그의 커다란 밴에 태워버려서 나는 부지불식간에 바로 로런스로 갈 수 있게 됐다.

 마지막으로 모두와 포옹을 나눈 나는 새까맣고 커다란 밴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야에서 밴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나는 차에 탔다. 왜인지 심장이 갈비뼈 사이에서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 * *

 로런스는 큰 도시와 도시 사이에 흩뿌려진 모래 알갱이처럼 존재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물론 지금 지미와 살고 있는 시카고 근교에 비하면 그렇다는 거고, 사람이 살기 불편할 정도로 가게나 시설이 들어오지 않은 깡촌은 아니었다. 집으로 향하기 전에 들린 식당도 음식 맛이 준수했다. 간단히 말해 수요가 아예 없을 지역은 아니라는 뜻이다.

 로런스로 오는 길엔 다행스럽게도 지미와 연락이 닿았다. 지미는 내가 아침에 보낸 문자를 보고 대화 좀 하자는 말을 들은 여느 남자처럼 상당히 겁에 질려 있었는데, 내가 받게 된 유산에 관해 듣고는 탄성만 내질렀다. 나는 이역만리 떨어진 여기서 튀어나올 듯 커진 그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지미와 삼십 분가량 전화한 끝에 우리는 집을 근사하게 고쳐서 좋은 가격에 팔기로 했다. 그리고 신탁 자금과 그동안 모아둔 저금으로 지미의 고향인 폰티액에 집을 사기로 했다.

 “집을 팔아 집을 산다니, 우리 부자가 된 것 같지 않아?”

 지미는 킥킥거리면서 말했다. 나는 남편이 웃으면서 농담하는 걸 무척 오랜만에 듣는다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돈이 있으면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루퍼스 씨가 준 쪽지는 시내를 지나쳐 국립공원 근처로 나를 안내했다. 마침내 맞는 스트리트에 진입하자 나는 산과 숲에 둘러싸인 아늑한 쿨데삭(Cul-de-sac)을 발견했다. 베드타운으로 계획된 블록은 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실제로 사람이 사는 집은 얼마 없는 듯했다. 사람들이 로런스를 떠나서인지 이 블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차차 알아가야 할 터였다.

 어쨌거나 쪽지에 따르면 옛 고향 집은 이 막다른 골목 끄트머리에 붙어 있었다. 집 외관과 우체통에 붙은 숫자를 유심히 살피며 한 채씩 신중하게 걸러낸 끝에 나는 옛 우리 집을 찾았다. 이스트 로드 438번지. 현관문 옆에 간신히 매달린 빛 바란 검은색 고딕 폰트 숫자들이 아니었으면 자칫 지나쳤을지도 모를 만큼 눈에 띄지 않는 이층집이었다. 좋게 말해 평범하고 나쁘게 말해 개성이 없는 집. 하지만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그런 비가시성 덕분에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한때 노란색이었을 페인트가 거의 벗겨진 걸 빼면 깨진 창문 하나 없이 멀쩡할 수 있었을 거라는 점이다.

 30년 가까이 방치된 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장 공포영화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비주얼을 생각했는데, 주택가에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았다. 평범한 고택을 손보는 것보다야 응당 더 품이 들겠지만, 오는 길에 각오한 것처럼 해체업자를 불러 집을 아예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아 보였다. 그 점에 왠지 모르게 용기를 얻었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었어도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짓는 것과 내부를 청소하고 외부에 페인트를 덧바르는 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다.

 삐뚤빼뚤한 흰색(추정) 펜스를 지나쳐 정체를 알 수 없는 풀들이 웃자라 엉망인 앞마당에 난 길(추정)을 따라가면 폭삭 내려앉은 계단 위에 이리저리 판자가 깨지거나 주저앉아 위험이 도사리는 포치가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판자를 조심스럽게 탐색하여 두 발을 딛고 선 나는 루퍼스 씨가 건네준 묵직한 열쇠 꾸러미(집에 방이 이렇게 많냐고 투덜거리자 루퍼스 씨는 그때 그 시절 집은 문이 세 개밖에 없어도 다 그랬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를 벨트 고리에서 빼냈다.

 십수 번의 시도 끝에 나는 맞는 열쇠를 찾아 잔뜩 녹슬어 뻑뻑하게 돌아가는 잠금을 열 수 있었다. 한참이나 열리지 않은 문을 열자 내부에서 탁한 먼지 냄새가 훅 풍겼다. 알게 모르게 비행 청소년이나 노숙자의 아지트로 쓰여서 온갖 고약한 냄새가 날 거라고 상상한 것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외부와 마찬가지로 내부도 생각보다 더럽지 않았다. 결코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더럽지는 않았다. 맥주병, 맥주캔, 양주병, 담뱃재, 과자봉지, 그 외 쓰레기란 쓰레기가 바닥을 뒤덮었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가구를 덮은 비닐과 바닥 위에 눈처럼 수북하게 쌓인 먼지와 바닥을 굴러다니는 잡동사니가 전부였다. 그 밖에 눈에 띄는 건 카펫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말라붙은 흔적이 보이는 것 정도. 당연히 몇몇 물건이 없어진 흔적도 보였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물건이 없어진 건지도 모르는데, 뭐.

 “뭐야? 청소 껌이겠는데?”

 거실을 휘휘 둘러본 나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나머지 공간은 침입자가 발을 들이기 제일 만만한 거실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깨끗하지, 더럽기는 힘들 터였다. 거실과 부엌을 치우면 다 끝낸 거나 다름없을 듯했다.

 그런데 집이 오래돼서 그런가, 이상하게 바깥보다 기온이 살짝 낮은 것 같았다. 밖은 적당히 뜨뜻 미적지근했는데 내부는 얇은 카디건이 필요할 정도였다. 못해도 바깥과 2~3도는 차이 난다는 말인데, 방열 문제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수 있나?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마음 뒤편으로 밀어두었다. 전문가를 불러서 집을 점검하는 건 내가 집을 한 번 쓸어낸 다음에 해도 충분했다. 이 집은 전기도 수도도 끊겨서 당장 전문가를 부른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 생각난 김에 전화해야겠다.”

 나는 지역 전기회사와 수도회사, 가스회사에 전화를 넣어 끊긴 시스템을 복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느 곳이든 최소 5일은 걸릴 거라고 답변이 왔다. 그 정도면 제법 빠르게 처리해 주는 편이라 적당히 만족했다. 그러면 해가 지기 전에 나가서 모텔 방을 잡아야겠군. 루퍼스 씨가 빠르게 서류 처리를 해준 덕분에 돈은 넉넉했다. 큰 공사가 필요하지 않으면 오히려 돈이 남을 정도였다.

 필요한 조치도 다 취했겠다, 본격적으로 집 안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래 갇혀서 꿉꿉해진 공기를 환기하려는데, 첫 번째 커튼부터 퀴퀴한 냄새가 나고 첫 번째 창문부터 인정사정없이 삐걱거렸다. 나는 바로 핸드폰 메모 앱을 켜서 ‘해야 할 일’ 페이지를 만들고 제일 위에 ‘커튼 빨래’와 ‘경첩에 기름칠하기’를 추가했다. 계획 없이 무턱대고 치우기 시작했다간 일주일을 다 쏟아부어도 청소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후로는 모든 방을 돌아다니면서 어디를 어떻게 치우고 고쳐야 할지 적었다. 집이 그리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할 일이 끊임없이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2층까지 전부 돌고 차고만 남았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얼른 끝내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무 생각 없이 차고 문을 벌컥 열었는데 뜻밖에도 차고에는 회색 커버가 씌워진 자동차가 있었다. 어째 자동차는 안 훔쳐 갔다고 신기하며 천막을 걷었더니 엉망진창으로 반파된 미의 결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버지가 나무에 들이박았다는 67년식 쉐비 임팔라였다. 유리창이 깨지고 도색이 벗겨지고 타이어가 찢어지고 기름 냄새와 탄내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어릴 적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 임팔라가 맞았다. 아버지가 사고를 낸 뒤 견인지로 끌려갔다가 아버지 명의로 된 이 집으로 옮겨진 모양이었다.

 “베이비…….”

 조금이라도 크게 움직였다간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 봐 까치발로 걸어간 나는 기스가 가득한 보닛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쇠 특유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손에게 의지가 생기기라도 했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보닛을 쓱쓱 쓰다듬기 시작했다.

 베이비는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손상을 입었는데도 여전히 품위가 있었다. 나와 샘은 이 세련되고 우아한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아버지가 다음에는 우리를 어디에 내려줄지, 거기서 우리가 어떤 모험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하며 조잘거리다가 지쳐 곯아떨어지곤 했다. 잠결에 듣는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와 롤링 스톤즈와 블랙 사바스는 또 얼마나 듣기 좋았는지…….

 “집을 팔게 돼도 넌 내가 어떻게서든 일리노이로 데려갈게. 너 같은 숙녀가 이런 곳에서 먼지만 쌓이는 건 인류에 대한 범죄거든. 겉모습은 걱정하지 마. 내가 다시 예전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는 근사한 모습으로 고쳐놓을 테니까.”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베이비에게 속삭였다. 그건 스스로와 하는 약속과도 같았다.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앞으로는 다시 헤어지지 않겠다는 약속.

 그렇게 정신을 놓고 보닛을 쓰다듬으면서 견적을 내길 한참.

 갑자기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평생 내가 냈다고 인정하지 않을 비명을(“꺅!!”) 지르면서 펄쩍 뛴 나는 허둥지둥 뒤를 돌아봤다. 그제야 주변이 이상하리만큼 어두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해가 벌써 다 졌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주변을 돌아봤다. 어디 수납장에서 연장통이 떨어졌는지 콘크리트 바닥에 엎어진 연장통과 연장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뭐, 뭐지? 쥐라도 지나갔나?”

 거세게 뛰는 심장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면서 심호흡했다. 안 그래도 차가운 공기에 조금 올라와 있던 소름이 팔뚝 전체로 확 끼쳐서 두 팔이 닭 껍질이나 다름없어졌다.

 나는 어쩐지 어두운 차고에 더 있고 싶지 않아서 괜히 호들갑을 떨며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바깥에 나와 하늘을 보니 아직 해가 하늘 끄트머리에 걸려 있었다. 그럼 차고는 왜 껌껌했던 걸까? 해를 가리는 구조물이 근처에 있는 걸까? 그래, 그런 걸 거야. 깊이 생각하지 말자. 배고파서 이러는 걸 거야. 내일 해가 밝을 때 배를 든든히 채워오면 오늘 일은 그냥 웃기는 해프닝이 될 거야.

 스멀스멀 가슴 아래부터 피어오르는 공포를 억지로 억누르며 세단으로 종종걸음쳤다. 막 펜스 밖으로 나서려는데 어쩐지 뒤에서 누가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 공포영화에서 제일 먼저 리타이어하는 여자 조연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곳은 현실이지 영화 속이 아니었으므로, 뒤를 돌아보면 그저 껌껌한 집이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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