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pricity
천국의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적어도 딘의 천국에는 그랬다.
매일 아침 그는 손가락 끝에 닿아오는 익숙한 감촉에 눈을 뜬다. 눈을 뜨면 그가 자는 새에 팔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미라클이 머리를 손에 비비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정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라클이 이곳으로 왔다. 어느 날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울음소리에 문을 열자 그가 문 앞에 있었던 것이다. 딘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어째서 너는 이곳으로 왔을까. 자신을 보며 반갑게 꼬리를 흔드는 미라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딘은 지상의 수많은 개들이 제 주인을 찾아 얼마나 먼 여행을 떠날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딘은 미라클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고 그렇게 미라클은 다시 한 번 그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아주 성가신 룸메이트지. 도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해보았으나 그가 깨어났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챈 미라클이 재빨리 바닥으로 내려가 짖기 시작했다. 밥을 제때 먹지 않으면 하루 종일 울어댈 기세인 미라클 덕택에 딘은 천국에서도 아주 일관적인 기상 시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눈을 떠 탁자 위 시계의 작은 바늘이 7을 가리키는 걸 본 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 눈이 부신 금빛 햇살에 얼굴을 찌푸리며 기지개를 켠 그는 미라클에게 먹일 사료를 꺼내 그릇에 부은 뒤 부엌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우유 한 팩을 제외하고는 텅 빈 아침 시간대의 냉장고 내부를 보며 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국에는-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식료품 가게랄 게 없었다. 모든 음식이나 식재료는 개인의 생전 기억에 맞춰 나타난다는 것이 딘에게 이 집을 안내해준 하급 천사의 설명이었는데, 그의 냉장고에는 무엇인가 오류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아침으로 베이컨을 먹지 못하는 후생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유를 꺼낸 뒤 냉장고 문을 조금 세게 닫은 딘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그가 기억하는 모든 베이컨이 들어간 음식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베이컨 샌드위치, 엘비스, 베이컨 피자, 그냥 베이컨 그리고 또다시 엘비스... 다시 문을 열자 냉장고 구석에는 계란 한 개가 들어있었고 딘은 욕설을 내뱉으며 냉장고의 문을 닫았다.
계란 하나로 스크램블을 만들어 먹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던지라 딘은 찬장을 열어 구석에 놓인 럭키 참스 시리얼을 꺼냈다. 벌써 5일째 같은 아침 메뉴였다. 이상하게도 이 시리얼만은 언제나 그의 찬장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리얼을 따른 그릇에 우유를 부은 딘은 마침내 식탁 위에 앉아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그새 밥을 다 먹은 미라클이 바닥을 분주하게 뛰어다닐 동안 딘은 휴대폰에 그가 자는 동안 온 몇 개의 문자를 확인했다. 두 개는 광고였고 (천국에도 광고성 메시지가 온다는 사실이 믿기는가?) 하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난 샘이 그에게 보낸 문자였다. 하늘을 나는 스케이트보드 광고의 번호를 연속으로 차단한 딘은 동생으로부터 온 문자를 열었다.
밤새 눈이 많이 왔어! 형도 나가서 봐. 괜히 치우려다가 허리 삐끗하지는 말고.
샘이 첨부한 하얀 세상의 사진을 찬찬히 살피던 딘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햇살이 들어오는 탓에 확실치는 않았지만 바깥이 오늘따라 유독 희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딘은 오늘 전까지 한 번도 이곳에 눈이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계절이나 날씨가 정해져 있지 않은 천국은 달력에 그날의 기온을 자동으로 표시해주는 시스템이 없었더라면 이곳의 사람들에 의해 차라리 지옥으로 내려 보내달라는 폭동으로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무언가 재치 있는 답장을 보내려 10분 째 휴대폰을 들고 고민하던 딘은 샘에게 엄지를 치켜든 이모지 하나를 보내는 데에 그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어서 빨리 마당의 눈을 전부 치우고는 거대한 눈사람이라도 만들어 샘을 골탕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안에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했다.
눈을 치우는 게 노동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거라고 생전의 그에게 말했더라면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천국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곳이라는 진술도 마찬가지였다. 매일같이 별똥별이 밤하늘을 수놓고 달을 직접 만져볼 수도 있는 천국에서의 나날들은 지상에서 그가 살았던 삶에 비하면 지나치게 무료했다. 시간이 흐른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도 딘은 매일이 전날보다 더욱 지루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만일 이것이 백 년이 되고 천 년이 되고 그 이상의 이름 모를 세월 동안 지속된다면? 이걸 과연 살아가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
그 정도의 세월을 살아왔을 누군가의 조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딘은 금방 그 생각을 떨쳐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이미 잠깐의 생각으로 그의 머릿속이 푸른 눈을 지닌 누군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들어찼다. 딘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달아날까 싶었지만 새카만 캔버스에는 기억하던 것보다 더 많은 그림들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예전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따뜻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그 파란 눈은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차갑도록 시린 색이었다. 아마 다시는 그 색을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그럴 터였다.
눈을 떴을 땐 손에 들린 하얀 시리얼 그릇이 파란색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집안 인테리어나 가구도 거주자의 감정 상태에 따라 변한답니다! 이름 모를 하급 천사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한때 그가 직접 꾸민 것 중 제일 뿌듯하게 생각했던 청록색의 모자이크 벽지가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우중충한 회색으로 바뀐 걸 보며 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거지를 하는 내내 딘은 파란 시리얼 그릇이 다시 하얀색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애꿎은 그릇을 손으로 연신 두들겼다.
설거지를 마친 딘은 곧바로 옷장으로 향해 그가 찾을 수 있는 가장 두꺼운 옷을 골랐다. 산책의 조짐이라고 본 것인지 꼬리를 당장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세차게 흔드는 미라클을 진정시킨 딘은 목줄을 챙긴 다음 문 앞에 섰다. 눈삽은 창고 안에 있었기에 밤새 쌓인 눈을 뚫고 그쪽까지만 가면 나머지는 훨씬 수월할 것이었다. 딘은 열린 문틈으로 눈이 쏟아지지 않도록 문 손잡이를 돌려 조심스럽게 당기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문을 연 그가 문 틈새로 발견한 건 최근에 연두색으로 새로 칠한 마루 판자였다. 이곳이 천국이어서인지 그의 페인트칠 실력이 출중해서인지 하나도 벗겨지지 않은 마루 판자를 보고 딘은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만일 오늘이 눈이 그의 허리춤까지 쌓여야 했을 날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남은 문을 세게 민 딘은 그의 현관 밖부터 앞마당까지, 눈이 내린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옆에서 미라클이 꼬리를 흔드는 걸 멈추고 바닥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만일 개들이 천국에서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미라클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왜 그 난리를 피웠던 거야? 딘도 같은 걸 묻고 싶었다. 왜 지금껏 그 난리를 피웠던 걸까?
현관 문 근처에 앉은 미라클을 뒤로 하고 딘은 서서히 마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샘이 그에게 장난을 친 것일까? 그럼 사진 속의 눈은 죄다 포토샵이겠어? 그의 안에서 갈등하는 두 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딘은 마당의 한가운데쯤에 다다르자 집 밖 도로 위의 풍경을 보고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딘은 왼쪽을 바라보았다. 옆집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딘은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은커녕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그를 조롱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딘은, 눈이 오지 않았거나 샘의 포토샵 스킬이 그가 모르는 새에 크게 나아진 게 아니라, 이 넓은 천국에서 유일하게 그의 집 위로 눈이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신기하네.”
“‘신기하네?’ 고작 할 말이 그거야? 내가 지금까지 보여준 사진을 다 보고도?”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놀랍다고?”
샘이 어깨를 으쓱이자 딘은 휴대폰을 거세게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휴대폰 액정에 금이 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천국의 유일한 장점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었다.
그의 집 주변에만 내리지 않은 눈을 목격하고 정확히 2시간이 지난 후 딘은 샘의 집에 와 있었다. 사실 기상이변이 그가 이곳에 발걸음을 하게 된 이유는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식재료를 공수하기 위해서였다. 사라져 버린 눈을 뒤로하고 맥주라도 꺼내 마시려던 딘은 냉장고 문을 열자 쏟아져 나오는 베이컨 무더기를 간신히 피해야만 했다. 저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 만들어 먹겠다는 의지로 딘은 과부하가 걸린 냉장고를 뒤로하고 샘의 집에 오게 되었다. 그가 목격한 이상 현상에 대해 이야기해줄 마음으로 최대한 빨리 눈을 헤치고 동생의 집에 왔으나 샘의 반응에 딘은 제법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틀림없이 문제가 있는 거라니까? 냉장고 일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위치가 안 좋은 게 분명해. 천사들한테 아직까지 악감정이 남아있어도 그렇지 나를 상대로 부동산 사기를-”
“아니면 형의 집이 유독 낮거나 높은 지대에 있던가.”
딘의 이야기를 듣던 내내 무언가를 분주히 찾던 샘이 그의 얼굴 앞으로 커다란 종이를 들이밀었다. 샘이 찾던 게 기껏해야 그를 위한 맥주일 줄 알았던 딘은 샘에게 받은 커다란 종이-지도를 보고도 한참을 멍을 때렸다. 고개를 내저은 샘이 도로 지도를 가져가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나침반과 지도를 활용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위치를 대충 간추려봤어.”
“왜 그런 짓을 했는데?”
“형은 형이 후생을 보낼 곳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일리가 있네. “그래서 뭘 알아냈어?”
“우리가 일단 천국에 있으니 대강 위쪽이라는 건 생각하기 쉽잖아? 위도나 경도가 잘 안 잡혀서 공중에서 이동하는 곳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더라고. 내 가설이 맞다면 우리는 아마 히말라야 산맥의 상공 근처에 있을 거야.”
지도를 가리킨 샘의 손가락 밑으로 붉은 동그라미가 눈에 띄었다. 이 모든 걸 계산해냈을 샘의 명석한 두뇌와 달리 형편없는 그림실력을 감안해도 두 채의 집처럼 보이는 그림이 동그라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와 샘의 집일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게 내 냉장고가 베이컨을 대포처럼 뱉어내는 거랑 뭔 상관이야?”
“끝까지 들어! 산이니까 높이가 일정하지 않다는 거지. 형이 있는 집이 유독 높거나 낮은 봉우리 위에 있다면 천국의 영향력을 덜 받거나 더 받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오류가 생기는 거 아냐?”
놀랍게도 매우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딘은 히말라야 산맥의 모든 봉우리 위로 집이 한 채씩 자리 잡은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황금광 시대의 찰리 채플린이 절벽 끝 산장에서 사투를 벌였던 것처럼, 딘도 지금껏 히말라야 산의 꼭대기에서 보이지 않는 봉우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면? 가끔 딘은 그의 후생이 실은 거대한 시트콤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을 하곤 했다.
“이건 내 예상이라는 거지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이따가 잭이 오기로 했으니까 걔한테 물어보던가. 이곳을 다시 만든 장본인이니 잘 알겠지.”
“뭐? 그 애가 여기에 왜 오는데?”
“가끔 와서 게임을 하다 가. 이번 주엔 체스를 두기로 했어. 형은 잭이랑 연락 자주 안 해?”
‘자주’의 빈도가 ‘거의 매일’을 뜻하는 것이라면 딘은 잭과 자주 연락을 하는 게 맞았다. ‘연락’의 의미를 ‘쌍방의 것’으로 해석한다면 아마 아닐 것이었다. 잭은 딘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문자를 보내곤 했다. 보통은 맥락 없이 이모지를 연달아 보내거나 그가 머무는 곳이 틀림없는 장소들의 매우 못 찍은 사진이었다. 참 누군가가 연상되는 화법이지? 딘은 그 문자를 전부 읽었지만 사실 딘은 잭이 신이라는, 거창하고 다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타이틀을 얻은 이후로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샘은 이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가 없었지만.
“당연히 자주 하지. 매일 문자도 보내.”
“그럼 캐스랑은?”
“...뭐?”
“캐스랑 연락 자주 해?”
책상 위의 지도를 접어 넣을 채비를 하는 샘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딘의 시선을 완전히 피했다. 행동으로는 잘 숨겼지만 샘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약간의 희망은 딘이 차마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생전 그들이 캐스와 쌓아올렸던 유대에 대한 그리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딘이 얼마인지 모를 시간 만에 들은 오랜 친구의 이름 앞에 느끼는 감정은 원망뿐이었다.
“카스티엘이 나와 대화를 하고 싶었으면 먼저 연락을 했겠지. 비겁하게 숨는 게 아니라.”
“형이 먼저 연락을 한다면 캐스가 바로 여기에 올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이 이야기도 더 이상 안 할 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딘은 샘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여기에 온 목적 또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식재료를 챙기러 온 거였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그 이상의 것은 의미가 없었다. 묵묵히 냉장고를 뒤지는 딘을 지켜보던 샘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그를 도우러 찬장을 열어젖혔다. 곁눈질로 샘의 쪽을 훔쳐보던 딘은 샘의 집 찬장을 가득 메운 갖가지 양념과 적어도 10가지 종류가 넘어 보이는 파스타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 네 집에는 항상 이렇게 재료가 풍부한 거야?”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니까. 우리는 이제 천국에 있으니 이들 방식대로 생각해야지. 지상의 방식이 아니라.”
딘의 쪽으로 뻗은 샘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지만, 다음 순간 딘이 눈을 깜빡이자 그의 손에는 커다란 케첩 통이 들려 있었다. 딘이 벙커에 머무를 때 자주 구입했던 브랜드와 같은 것이었다. 얼떨결에 샘의 손에 들린 케첩 통을 받은 딘은 미심쩍은 눈으로 손에 들린 통을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이며 그가 가져온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았다.
“나는 아직 천국의 방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나 봐. 저번에 잔디 깎기를 상상했는데 3번 연속으로 면도기밖에 안 나타나더라고.”
그 말에 샘이 웃음을 터뜨렸다. 샘만큼은 아니었지만 딘도 작은 미소를 지어 보았다. 이거면 될 터였다. 딘의 삶에는 여전히 그의 거지같은 농담에 웃어주는 동생이 있었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라는, 그가 얻을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 성취가 있었다. 그 이상으로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방법은 진짜 간단한 거 알지? 단순히 물건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형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 딱 하나만을 생각해야 통할거야.”
내가 원하는 단 한 가지는...
“내가 무얼 원하던 뭔 상관이야. 그냥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오기만을 바랄 뿐인데.”
...결코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었지.
갑작스럽게 변한 딘의 태도에 샘은 식료품을 꺼내던 것을 멈추고는 그의 형을 바라보았다. 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샘이 꺼낸 준 식재료마저 대충 장바구니에 넣은 딘은 의자에 걸려 있던 그의 코트를 낚아챘다.
“...잭은 안 만나고 갈 거야?”
“내가 뭐 하러? 어차피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사이도 아닌데.”
코트에 거칠게 팔을 쑤셔 넣고 목도리를 대충 둘러맨 딘은 무거운 바구니를 든 채 문가로 향했다. 문을 열자 여전히 거의 치워지지 않은 눈이 품은 냉기가 금세 옷자락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옷을 여미고 싶었지만 딘은 손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그거 알아? 형네 집에만 눈이 안 내렸다는 게 다시 생각하니 형 말대로 믿기지가 않네.”
샘의 목소리에서도 마찬가지로 화난 어조를 읽어낼 수 있었다. 아마 천국에 오고 나서 딘에게 날을 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질 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양측 모두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겠지만, 멍청한 선택을 반복하는 게 특기였던 딘은 문가에 서서 샘이 마지막 일격을 날릴 때까지 기다렸다.
“형이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데 어떻게 그 틈으로 햇살이 들어오겠어.”
딘은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문을 닫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입을 열고 공중에 길게 숨을 내뱉어 보았으나 입김이 서리지 않았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육신이라 부를만한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숨을 내쉬는 게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밖에 있느라 앉은 벤치와 함께 얼어붙을 정도로 몸의 기온이 내려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폭설에, 챙겨야 할 식재료까지 있는 마당에 곧장 집으로 직행하는 게 나았겠지만 밖의 기온은 냉장고 내부와 큰 차이가 없었고 딘에게는 세상 그 누구보다 시간이 많았다.
딘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지금은 눈이 쌓여서 잘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앉은 자리에서 놀이터가 보이는 공원이었다. 동네에 아이들이 살지도 않는데 어째서 천사들이 놀이터가 있는 집터를 마련해 주었냐는 바비 아저씨의 질문에 딘은 어깨를 으쓱였다. 구경하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는 순간이 있다며. 맥주병을 기울이던 아저씨도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마 누군가가 아주 어렸을 적 공 던지기 놀이를 해주었던 기억을 여전히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라. 딘은 그가 앉은 벤치의 왼쪽에 위치한 또 다른 벤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앉았던 존재가 처음으로 보인 미소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났는데, 그 삶이 어느 순간 끝나버렸다는 사실은 나름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한 현재에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기억을 되짚어보는 건 생전 딘의 표현을 빌리자면 ‘낯간지러운’ 일이었지만 이제 그는 죽었으니 아무도 그에게 뭐라 할 사람은 없었고 거기에는 딘 자신도 포함되었다.
너는 우리의 적들이 너를 보듯 네 자신을 바라보지.
캐스는 언젠가 딘에게 그가 제일 아끼는 천국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곳도 마찬가지로 공원이었다. 욕조에 익사하여 죽은, 자폐증이 있는 남자의 영원한 화요일 오후. 기억을 조금 더 떠올려 보니 인간인 캐스가 주유소에서 일하던 시기에 그에게 해준 이야기였다. 데이트 신청을 착각했던 캐스가 침울해져 있자 딘은 그가 머물던 모텔 근처의 술집에 캐스를 데려갔다. 바 하나를 통째로 마셨던 천사 시절의 무시무시한 주량과는 달리 인간인 캐스는 위스키 한 잔에 완전히 맛이 가버리고 말았다. 인간이 되고 나서 불편한 점들을 늘어놓으며 웃음을 터뜨리던 캐스는 그가 이전에 천국에서 보았던 것들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캐스가 부리는 주사가 기껏해야 토하는 정도라 생각했던 딘은 캐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이야기들에 술을 마시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을 했다. 그날 캐스가 거의 기절하듯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해주었던 이야기가 바로 캐스가 제일 아끼는 천국에 대한 것이었다.
“그럼 넌 욕조에 익사해서 죽은 그 불쌍한 남자에게 별로 동정심이 들지는 않겠네? 그가 죽어서 네가 제일 좋아하는 천국이 생긴 거면.”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내가 그 천국을 지나치게 아끼는 것 같다.”
딘이 캐스의 어깨를 때리며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천사일 것 같은 캐스는 놀랍게도 딘에게 이런 큰 웃음을 선사할 때가 많았다. 정작 지금의 캐스는 천사가 아니지만. 그의 옆에서 활짝 웃는 캐스의 미소에는 조금 낯선 구석이 있었다. 지나치게 위쪽을 향한 입 꼬리라던가 입 근처에 약간 패여 들어간 주름과 같은. 캐스도 늙어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그의 그릇이 늙는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의 캐스는 늙어 가는 것이 가능한 게 아니었던가?
“너의 천국에는 무엇이 있을 것 같나?”
“나?”
“네게 묻는 것이 맞다. 네 천국에는 무엇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딘? 예전과 다른 모습일 것 같나? 아니면 완전히 같은 모습?”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저질러놓고도 천사들이 나를 천국에 들여보내 주겠어?”
“틀린 말은 아니군.”
캐스가 어김없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딘은 급하게 위스키 잔을 입에 대어 그의 어색한 미소를 숨겼다. 그 생각을 안 해보았다고 말하는 건 거짓일 터였다. 천국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난 다음 딘은 영원한 안식처의 모습을 가끔 상상해 보곤 했다. 물론 샘과 함께 그들의 천국을 방문한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것도 꽤나 오래전 일이었다. 그의 천국에서 영원히 반복될 아름다운 기억이 새로 갱신되었을까를 고민하던 딘은 캐스가 그의 어깨를 쿡쿡 찌르자 다시 그의 친구에게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만일 네게 머물 천국이 다시 생긴다면 딘, 그게 샘과 나눈 불꽃놀이에 대한 추억이든 아니던, 그 천국은 영원한 화요일 오후보다 훨씬 더 나은 곳이 될 거라 생각한다.”
“어째서?”
“왜냐하면 그곳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곳일 테니까. 더 이상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내가 알고 기억하는 천국이 될 거다 딘.”
더 이상 주사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워진 대화 주제에 딘은 손에 들린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는 캐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지 말라는 핀잔을 주려다 이내 아주 큰 용기를 내어 다음 날 아침에 이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 캐스에게 그가 이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묻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가 만일 천국에 가게 된다면... 우리가 작별인사를 하게 될까?”
캐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딘의 질문을 채 듣기도 전에 테이블에 엎어진 캐스는 거의 쓰러지듯 잠에 들어버렸다. 딘은 무거운 캐스와 그것보다 더 무거워진 자신의 마음을 부축하며 술집으로부터 나섰다.
왜 이것이 작별인사처럼 들리지?
왜냐하면 그게 맞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딘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있었다. 캐스를 데려갔던 공허와도 같은 어둠이 걷혔지만 딘은 여전히 그때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한 채. 그리고 여전히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건네지 못한 채로. 이 상황에서 제일 부당한 건 캐스는 더 이상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천국에 왔고 영원한 안식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딘은 안식을 찾지 못했고 캐스는 영원히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바보 같은 놈.”
“누가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딘은 전혀 그답지 않은 이상한 비명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굴러떨어질 뻔 했다. 앉은 자리에서 왼쪽을 바라보자 아주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얼굴이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띤 잭은 한겨울에도 여전히 얇은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전혀 추위에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깜짝 놀랐잖아!”
“아, 미안해요. 몇 분 전부터 여기 앉아있었는데 아무 말 않는 바람에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여기는 어떻게 찾아온 거야?”
“샘네 집에 다녀오는 길에 딘도 만날까 생각해서 왔어요. 문자에 답이 없기에 요즘 바쁜 줄 알았는데 샘이 그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입술을 살짝 깨문 딘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잭의 시선을 피해 보았다. 답장 정도는 한 번쯤 넣어줄걸. 책상다리를 한 채 벤치에 앉은 잭은 딘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처음 그를 경찰서에서 발견했을 때 입고 있었던 펜들턴 재킷과 청바지, 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잭은 신이 되었다 해서 딱히 새로운 패션을 찾지는 못한 것 같았다.
“샘이랑은 뭐했어?”
“체스를 두었는데 또 졌어요. 벌써 9번째 패배인데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신이 내 동생보다 체스를 못 둔다고?”
“그야 저는 신이지만 동시에 잭이니까요.”
이 세상의 모든 걸 관할하는 신과 신발 끈 묶는 것도 겨우 배운 잭. 예전의 딘이었다면 이 두 가지는 양립 불가능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오랜 친구가 알려준 것처럼, 그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널 알게 된 게 날 바꿔놓았다.
“요즘은 체스랑 시를 배우고 있는데 만족스러워요. 딘에게도 최근에 시를 한 편 보냈는데 읽어봤어요? 제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시 중에 하나인데.”
그러고 보니 잭이 저번에 글처럼 보이는 것의 사진을 찍어 보낸 적이 있었다. 흔들림이 심해서 셔터 버튼을 잘못 누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 깜빡했다. 집에 가는 길에 꼭 읽어볼게.”
“그리 길지 않아서 집에 가는 길에 읽기 편할 거예요.”
“하긴. 내 천국이 고작 30분 정도 거리의 작은 동네일 줄 누가 알았겠냐.”
“여기서의 삶에는 만족하고 있나요?”
딘은 당연히 그가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후생이라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니었던가. 모든 게 백지화되어 얼마든지 새로운 이야기를, 전혀 어두운 기억으로 물들지 않은 그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는 곳. 그렇기에 캐스는 새 출발을 원했을까? 정작 천국에 온 그는 그만의 이야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단 한 장조차 시작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거 하니까 마침 이야기할 게 있다. 만족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어.”
“어째서죠?”
“우리 집 인테리어나 음식 공급이 갈수록 내 기억이나 감정에 상관없이 변하더라. 샘 말대로 우리가 히말라야의 울퉁불퉁한 꼭대기인지 뭔지에 위치해 있다면, 내 집이 그중에서도 가장 안 좋은 위치에 걸쳐 있나 봐. 계속 천국의 힘이 오락가락하는 곳에.”
“히말라야 봉우리 위에 여기가 위치하는 게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류가 생길 수 없는데. 흐음...”
적어도 샘이 한 가지는 맞았군.
“혹시 딘은... 이곳을 집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눈을 몇 번 깜빡인 딘은 잭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히 여기가 내 집이지. 아니라면 나랑 미라클이 지금껏 잘살고 있던 곳은 대체 뭐야?”
잭이 웃음을 터뜨리자 딘은 자신이 또 아주 멍청한 이야기를 꺼낸 게 틀림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집이라는 건 단순히 살아가는 장소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딘이 여기에 진정으로 어울린다고 느끼고 있어야 이곳이 완전히 집이 되는 거죠. 천국의 시스템을 온전히 활용할 수 없다면 딘은 아직 이곳을 집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거예요.”
어린아이가 식사 자리에서 갑자기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꺼내어 부모를 당황시키는 순간들을 겪은 적이 있는가? 딘은 지금 딱 그런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네가 말하려는 게... 내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아니요! 딘은 당연히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이죠! 하지만...”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피하는 척을 하는 잭은 아주 오랜만에 그의 나이 또래 아이들이 할 법한 행동을 보였다. 딘은 치사하게 부모의 수법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눈썹을 살짝 올린 채 잭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압박을 못 견딘 잭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면 딘의 삶에 무언가 중요한 게 빠져있을 확률이 높아요. 그걸 찾아야 행복해질 수 있을 거고, 그걸 찾아야 살아갈 수 있는 거죠.”
행복은 소유하는 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거다.
“나는...”
그때 무언가 차가운 것이 딘의 눈꺼풀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손을 뻗어 눈 주위를 더듬자 물기가 느껴졌다. 주위는 몰려오는 먹구름의 여파로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폭설의 조짐은 한편으로는 좋은 핑곗거리가 될 수 있었다. 딘은 어쩐지 더 무겁게 느껴지는 장바구니를 한 손으로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벤치에 앉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잭에게 딘은 다른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철학 담론은 다 됐다. 나는 눈이 쌓이기 전에 들어가 봐야겠-”
딘의 손을 덥석 잡은 잭은 그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빈틈을 타 그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잭의 포옹에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한 딘은 잠시 균형을 잡다가 이내 악수를 거절당한 손으로 잭의 등을 몇 번 두드려주었다.
“더 자주 연락할 거죠?”
“...그래.”
당장 오늘부터라도 밀린 문자에 일일이 답장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딘은 잭이 마침내 그를 풀어주자 목도리를 단단하게 여몄다. 그대로 잭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려던 딘은 이제 대놓고 펑펑 내리기 시작한 눈을 머리칼에서 털어내다 아주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 왜 너한테는 눈이 하나도 쌓이지 않는 거야?”
“아, 아마 천국이 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일거에요. 신이 가진 에너지가 너무 방대해서 오히려 하급 천사 정도로 인지한다고 해야 되나? 여기서 천사들은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거든요.”
설마...
“이제 진짜 가봐야겠다. 어... 미라클이 나를 기다리네.”
“저도 그게 느껴져요. 제가 말했다는 건 미라클에게 비밀인데... 당장 저녁을 주지 않으면 가구를 물어뜯겠다네요.”
만일 지금 그가 생각한 가설이 맞다면 딘은 미라클이 소파 100개를 물어뜯어도 개의치 않을 것이었다.
“곧 또 보자 꼬맹아.”
“물론이죠, 딘. 가는 길에 제가 보내준 시도 읽어 보고요!”
“그럴게. 이번에는 꼭.”
잭이 그의 마지막 말을 들었을지 이미 뒤를 돈 딘은 알 길이 없었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굳이 뒤를 돌지 않아도 잭의 미소를 느낄 수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딘은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 번 그의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Nature’s first green is gold,
Her hardest hue to hold.
Her early leaf’s a flower;
But only so an hour.
Then leaf subsides to leaf.
So Eden sank to grief,
So dawn goes down to day.
Nothing gold can stay.
잭의 말대로 시를 다 읽어갈 때쯤이 되자 딘은 집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눈을 맞으며 1.8m짜리 눈사람이 되었던 딘이 집의 마당으로 들어오자 서서히 눈이 녹기 시작했다. 딘은 잠시 눈을 감은 채 따스한 햇살을 만끽했다. 여전히 눈이 내리는 바깥세상과 달리 푸른 잔디를 은은하게 비추는 햇볕이 내리쬐는 그의 집은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에 나올 것 같은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동시에 아름답기도 했다. 만일 그 이유를 몰랐더라면 더욱 아름답다고 느꼈을 것이었다.
“하지만 너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 안 그래, 캐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딘의 뒤로 펄럭이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아마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안녕, 딘.”
딘은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그가 있었다. 목요일의 천사 카스티엘, ‘캐스’가. 여전히 망할 트렌치코트를 입었고, 여전히 넥타이는 비뚤어져 있었으며, 여전히 그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딘은 갑자기 왼쪽 어깨에서부터 몸 전체로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욱신거림이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천국에 오고 나서는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그의 육신은 잊었으나 영혼은 잊지 못한 기억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어?”
“꽤 오래 서 있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지? 지금껏 쭉?”
“...그렇다.”
“여기에 눈이 내리지 않는 것도 다 네가 줄곧 그곳에 꿈쩍도 않고 서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 또한 그렇지.”
“못 믿어. 만약 네 말이 맞다면 왜 네가 서 있는 자리만 눈이 안 온 게 아니라, 내 집 전체가 이 꼴이 된 건데?”
“그건 아마 내가 대천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천국에서는 내 그릇이 아닌, 내 자신이 이곳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대천사의 본모습은 다소... 거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크게 둘러보았다. 거대한 눈이라도 마주치면 한 대를 쳐버릴 생각으로. 주위에는 잔디 깎기와 이미 그의 손을 떠난 지 오래인 장바구니를 제외하고는 캐스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딘은 허공에 주먹질을 하려다 그게 얼마나 멍청하게 보이는 광경일지 생각하고는 이내 마음을 접었다.
“네가 이제는 대천사라고? 미카엘이나 루시퍼 같은? 승진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네 캐스. 이메일이라도 보내주지 그랬어.”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럼 뭐? 대천사가 된 게 네가 지금까지 우리 집 위에서 나를 쭉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거에 대한 핑계라도 되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네 집 밑에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딘이 소리를 지르자 입을 다문 캐스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캐스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둘 중 누군가가 화가 났다면, 그건 딘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애꿎은 목도리를 연신 잡아당긴 딘은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 내쉬는 행위를 반복했다. 어느 정도 호흡을 가다듬은 딘은 그제야 캐스가 어느 날 그의 앞에 나타난다면 묻고 싶었던 단 하나의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랬어?”
“......”
“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은 거야? 이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
“딘, 나는...”
“너는 이미 한 번 내게 진실을 털어놓았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말해줘. 진실을.”
그래야 내가...
“나는 두려웠다.”
딘은 목도리를 잡아당기는 걸 멈추고는 캐스를 바라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인지 설명을 해달라는 듯이. 죽어도 오늘이 지나기 전까지 딘을 쳐다보지 않을 기세인 캐스와, 녹아내리는 눈으로부터 흐르는 물이 딘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고, 그의 존재를 인지한 미라클이 현관문을 발톱으로 긁으며 짖어대는 와중에, 그의 머릿속에 아주 멍청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이 멍청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내 반응을 두려워한 거야?”
캐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딘은 그 침묵이 동의와도 다를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천사잖아 캐스. 네가 두려워하면 안 되지. 네가-”
딘은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거나, 미친 듯이 웃고 싶었다. 세 가지 모두를 동시에 할 수 있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딘의 말문을 막히게 한 것은 이전에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그의 시야에 들어온 현상이었다. 그의 말을 멈추게 한 건 무언가 희뿌연 것이 그의 시야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가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입김이었다. 아까까지는 생기지 않았던 것인데.
여기서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면 딘의 삶에 무언가 중요한 게 빠져있을 확률이 높아요. 그걸 찾아야 행복해질 수 있을 거고, 그걸 찾아야 살아갈 수 있는 거죠.
살아간다는 것.
딘은 캐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딘이 다음 순간에 꺼낼 말이 자신에게 사형선고가 될 것처럼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캐스를 보았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 주변을 커다란 날개로 감싸고 있을 카스티엘의 모습을 좇아보았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여전히 날 사랑해?”
계속해서 딘의 시선을 피하던 캐스는 (딘은 문득 거대한 대천사로의 카스티엘도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약간 크게 뜬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맞춰왔다. 딘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것이라고는 차마 생각도 못 했다는 듯.
“그렇다.”
“하지만 내가 널 사랑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구나.”
“......”
캐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딘은 캐스의 침묵을 이해했고 이제는 캐스가 아닌 딘이 답할 차례였다.
“너는 아마 기억 못 하겠지만 우리는 내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
머리를 옆으로 기울인 캐스는 잠시 딘의 질문을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주유소에서 일할 때를 말하는 것인가?”
“맞아. 그럼 혹시 네가 잠들기 전에 내가 물은 질문도 기억해?”
캐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묻기를...”
딘은 서서히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캐스와 그 사이에는 생전 딘이 만족했을 만큼의 거리가 있었지만, 후생에서의 딘이 만족하는 거리는 아니었다. 간격이 점차 좁혀오다 못해 딘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이번에는 도리어 캐스가 당황한 눈치였다.
“딘, 네가 내 공간을 침범하는 것 같다만...”
“닥쳐, 캐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난 그때... 네게 만일 내가 천국에 가게 된다면 우리가 작별인사를 하게 될 거냐고 물었어.”
“...그렇군.”
“내가 그 질문을 한 이유는-”
“작별을 원하는가?”
그 말을 듣자 딘이 겨우 붙잡았던 이성의 끈이 완전히 창밖으로 날아가고야 말았다. 캐스가 그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 아니라, 캐스가 그의 가장 진실 된 마음을 딘에게 털어놓고 난 이후에도 확신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였다. 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어느 때보다 슬펐으며, 그의 삶을 통틀어 가장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건 딘만의 감정이 아닐 터였다. 작별이라는 단어와 함께 순식간에 눈에 머금었던 빛이 꺼져 나가는 듯한 캐스를 보며 딘은 그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딘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캐스와 딘 자신에게, 마지막 확신을 주는 것. 딘은 캐스의 멱살을 잡아, 얼마 남지 않은 그들 사이의 거리를 좁힌 다음, 캐스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포개었다.
딘의 동네에는 많은 주민이 살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아이러니하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눈 내리는 한복판 봄날 같은 햇볕이 내리쬐는 집 아래에서, 각각 가을과 겨울의 옷을 입은 남자 둘이 입술을 맞대고 있는 광경이. 딘은 여전히 이 모든 상황이 시트콤의 일부여도 믿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캐스로부터 떨어졌다. 캐스는 뭐랄까, 그가 본 것 중 가장 인간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앞에서 눈물을 보였을 때보다도 더욱. 놀랐으면서도 안심했으며, 슬프지만 동시에 기쁜 표정이었다. 아마 캐스는 이제 인간의 모든 것을 이해할 것이다. 아마 천사들 중 유일하게 인간이라는 걸 진정 이해해본 존재가 될 것이다.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캐스. 젠장!”
속삭임에 가까운 딘의 말이 끝나게 무섭게 캐스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끌어안았다. 아까 잭이 딘에게 선물해준 가벼운 포옹과 달리 캐스는 거의 그를 쥐어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딘도 캐스를 마찬가지로 세게 끌어안았다. 연옥에서 캐스를 발견했을 때, 그가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 세상을 지키려 했을 때, 캐스에게 절박한 기도를 보낸 이후에 재회했을 때, 그리고 지금. 모든 포옹이 이전의 경우보다 더욱 절절하게 와 닿았다. 딘은 더 이상 그의 얼굴에서 흐르는 것이 눈이 녹은 물이 아니라 그의 눈물이라는 걸 인정하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벽같이 단단한 캐스와 맞닿은 자신의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천국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심장박동일지도 몰랐다.
그는 이 시점으로 완전히 살아난 것일지도 몰랐다.
“...그쯤하면 됐어 캐스. 나를 압사시킬 셈이야?”
“너는 천국에 있는 한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캐스는 재빨리 딘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살짝 뒤로 물러나 딘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캐스가 눈물 자국을 발견한 듯 눈을 약간 크게 뜨자 딘은 재빨리 목도리를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캐스는 목도리를 미라처럼 얼굴에 두른 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주유소에서 그가 보였던 미소가 아직도 캐스의 얼굴에 남아있었다. 다시 한 번 캐스의 입술에 잠시 눈이 간 딘이었으나 그제야 미라클이 집안에서 열심히 짖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뭐, 남은 것은 천천히 따라잡아도 늦지 않을 터였다.
“미라클 밥 줘야 되겠다. 일단 우리 집에 들어가자.”
“‘우리’ 집이라고?”
“너무 앞서 갈 생각 마 캐스.”
캐스는 눈을 굴리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고, 딘이 목도리를 내려 시야를 확보할 동안 그의 장바구니를 친히 바닥에서 들어주는 신사 같은 태도를 보였다. 앞장선 딘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보고 반갑게 짖던 미라클이 뒤따른 캐스를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너희 둘은 초면이지? 잠깐 인사나 하고 있어봐.”
캐스가 가볍게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힘겹게 식탁 카운터 위에 올린 딘은 냉장고로 직행하려다 미라클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문가에 서있는 캐스는 미라클을 쓰다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미라클은 그에게 뻗어진 캐스의 손을 물어뜯어야 하는 뼈다귀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캐스가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는 건 아니었지만.
“보통 낯선 사람이라도 잘 따르는데 오늘따라 애가 이상하네.”
“그건 아마 미라클이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본모습을.”
“대체 본모습이 얼마나 이상하기에 그런 반응이냐?”
그를 매섭게 째려보는 캐스의 시선에 딘은 웃음을 터뜨리며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차, 베이컨. 폭포처럼 쏟아져 나올 베이컨 무더기에 파묻힐 준비를 한 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떠한 차가운 팩도 얼굴에 와 닿는 게 느껴지지 않자 딘은 실눈을 떴다. 냉장고는 재료들로 꽉 차 있었다. 한 팩밖에 안 남은 베이컨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야채와, 그가 저녁에 만들려고 했던 스튜의 재료까지 전부.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냈을지 잠시 고민하던 딘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집으로 들어온 캐스가 인테리어를 찬찬히 살피는 모습과, 캐스의 팔에 매달린 미라클이 여전히 캐스를 잘근잘근 씹으려 노력하지만 빈번이 실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캐스가 마침내 자신을 바라보는 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집에 잘 돌아왔어 캐스.”
그날 저녁 딘은 드디어 제대로 된 요리를 완성했고, 식탁에 둘러앉아 캐스와 함께 그 요리를 먹었다. 캐스는 천국에서는 분자 맛이 약간은 다르게 느껴진다는 코멘트를 남겼고 미라클은 캐스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으르렁거렸지만 더 이상 그를 물어뜯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를 마칠 때쯤이 되자 딘은 마지막으로 작은 변화를 발견했다. 그가 홀로 식사를 할 때 식탁 위를 비췄던 하얀 형광등의 빛이 그가 모르는 새에 금빛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딘은 찬란한 금빛 조명이 식탁 위를 아주 오랫동안 비출 것이라 생각했다. 함께 맞는 아침 햇살도 그럴 것이다. 다음 날에도,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